예수는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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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1.1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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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 후안 아리아스. 성바오로출판사, 1988

가톨릭일꾼운동의 창립자였던 도로시 데이는 “평생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 주고 평생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는 이유로 1973년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레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어느 순간 예수님께 사로잡힌 영혼은 나머지 삶을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알아듣고 섬기다가 1980년 11월 29일 생애를 마감했는데, 도로시 데이가 무덤가에 남긴 묘비명은 “하느님 감사합니다”(Deo gracias)였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요한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감옥에서 들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묻게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이어지는 말씀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11,6)입니다. 주교회의의 성경번역과 달리 분도출판사에서 번역한 200주년 신약성서는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진 소식이 복음/기쁜소식으로 들리는 사람도 있고, 흉음/불길한 소식으로 들리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이런 이야기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음이지만 부자들에게는 흉음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아예 대놓고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의 실체를 밝힙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0.24) 그러니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디딤돌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격렬한 복음말씀이 우리 삶에 결정적인 도전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다시 새겨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이에게 걸림돌이었다

후안 아리아스는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성바오로출판사, 1988)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때만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정말 복음적이라면 교회는 세상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지금 교회가 부자들에게 디딤돌이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우리 교회는 복음과 아주 멀리 있는 것이겠지요.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에 뼈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었다. 하느님으로 자신을 드러낸 예수를 배척했던 유다인들에게, 예수가 마귀가 들려 미쳤다고 한 사람에게(10,20), 예수가 자유의 정신을 가졌으며 자비를 베푼 사실을 비방한 율법학자들에게, 스승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한 카야파를 비롯한 권력자들에게, 예수의 기적을 믿지 않았던 그분의 친척들에게, 소년 예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그분에게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하고 꾸짖은 어머니까지도,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 15,13) 하고 외치던 백성들에게도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걸림돌이었다.”(42쪽)

교회 자체가 걸림돌이 될 때

교회의 권력구조는 예수님에 대한 교회의 신실성에 의문을 품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세상과 다름없는 서열체계를 경험한다면, 보잘것없는 이들 하나하나가 다 자신이라고 선언했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색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구가 되기 위하여 신적 권능과 특권을 포기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만 속하는 특권을 횡령해 온 역사를 교회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이며, 이들은 하느님 백성을 통치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층이 자신을 신적 권위 안으로 들여놓으려는 위험성을 예수님은 생전에 이미 알고 계셨던 듯합니다. 그분은 최후의 만찬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3-17)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행동과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제자 교육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주인이며 스승인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라 합니다. 체험 학습입니다. 그분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상징적 퍼포먼스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지요. 그분은 자발적으로 ‘윗자리’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가질만한 모든 특권을 포기하셨기 때문에 항시 존경받기를 탐하고, 상석을 기대하는 율법학자들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현실은 어떤지 돌아보면 참혹합니다. 예수님이 보시면 “이젠 너희가 바리사이들이 다 되었구나.” 하실까 걱정됩니다.

 

사진출처=ekklisiaonline.gr
사진출처=ekklisiaonline.gr

스승이요 아버지란 소리 듣지 마라

권력과 칭찬에 약한 사람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예수님은 아주 엄중하게 제자들에게 훈계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8-11)

베드로 사도는 이 가르침을 잘 알아듣고 행했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는 자기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였지만, 코르넬리우스에게 형제요 친구로 다가섰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며, 후안 아리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기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들려주신 이 말씀, 그토록 분명하고 그토록 준엄하게 들려주신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교회 공동체 또는 수도공동체 안에서 왜 그토록 권위를 남용해 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91쪽)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스승, 아버지, 지도자라는 칭호를 남발하고 전통으로 굳혀 나갔으며, 최근까지도 교황과 추기경, 주교 등을 부를 때 “전하, 각하, 지극히 공경하올, 지극히 거룩하신” 등의 호칭을 사용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극존칭을 고위성직자들에게 붙이지 않지만, 교계제도의 구조적, 심리적 계급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경우에 교황(敎皇), 주교(主敎), 신부(神父)란 말로 황제, 주인,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호칭은 봉건적 교회의 유습이라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복음서를 읽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대목에 와서는 생각하기를 그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 현실로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이 얼마나 복음대로 살기 어려운 현실적 고충을 이해하고 있는 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후안 아리아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제자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으면서 스승이라 불리는 일, 자신의 학식으로 못 배운 대중을 깔보지 않으면서 지도자 소리를 듣는 일, 지나친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라 불리는 일, 아랫사람이 권위의 중압을 느끼지 않도록 하면서 웃어른 소리를 듣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꿰뚫어 보셨다.”(92쪽)

도로시 데이는 예수님을 아는 만큼 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왜? 그분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지금 내게 걸림돌이 된다면 그만큼 내 사랑이 작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 안에 머무시고, 이미 내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신 분을 따라가려고, 내 사랑의 크기를 가늠해 보는 시간입니다. 밤공기가 차가워지면서,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보름달이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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