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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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건다는 것
  • 토머스 머튼
  • 승인 2024.01.1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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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
Emmaus by Janet Brooks-Gerloff, 1992
Emmaus by Janet Brooks-Gerloff, 1992

영적인 완전함은 교회체제에 대한 순응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라는 효율적인 기계 안에서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하나가 된다고 해도 그가 영혼이라는 성전 안에서 내적으로 하느님을 추구하지 않는 이상 그를 결코 성인이 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교권에 의해 축복 받은 전통적인 규범들로부터 규제를 받는 수도자의 평범한 일상은 그것이 확실히 성화를 위한 가장 값진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수도자들에게 그 직분에 가장 본질적인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틀에 불과한 것이다. 그 규범들은 목적을 갖고 있다. 목적이 시행되어야 한다. 골격을 실제 건물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교회의 실질적인 건물이라고 하면 사랑, 희생, 자기초월로 가득한 마음 사이의 일치인 것이다. 이 건물의 건실함은 성령이 우리 각자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우리의 외적인 행위들이 만든 체계에 의해 정돈되고 규제되는 정도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인 삶은 필수적으로 특정 질서를 요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형제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그러나 질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또한 단순한 무질서가 거룩함은 아니다.

영적인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골격에 너무 많은 노력을 쏟아 붓고 있는데, 그래서 그것을 더욱 단단하고 영구적이며 안전하게 세우기는 하지만, 건물 그 자체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고독하고 내면적인 그리스도적 삶에서 져야 할 진정한 책임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접적으로도 어느 누구에게 표현하기 힘든 문제다.

그들은 그 문제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자신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 내면적인 영역에서 진보나 완전함을 증명할 만한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반면에 외적인 영역에서 발전은 쉽게 측정될 수 있으며 결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보여져 그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진실되며 지속적인 작업은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알아 볼 수 없다. 하느님만이 아신다. 이 작업은 명백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대한 충실함이라기 보다 믿음인 것이다:

그것은 내적이고, 고통스러우며, 거의 필사적인 고독의 몸짓으로,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있는 그분의 말씀과 그분 의지의 표현을 알아차림으로써 또한 그분에 의해 설립된 권위에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례 때마다 교회 전체와 함께 자랑스럽게 노래하는 사도신경은 각자 내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놓았을 경우에 한해서만 진실하고 타당한 것으로, 그 뜻은 외적으로는 교회와 그것의 위계로 나타나며 내적으로는 거룩한 은총이 주시는 영감에 의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과 그분의 교회에 거는 것이며, 모든 능력과 거룩함을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에 맡기는 것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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