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관계를 일깨우는 베드로의 닭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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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관계를 일깨우는 베드로의 닭 울음소리
  • 최태선
  • 승인 2024.01.1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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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내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나는 만나는 그리스도인들과 영원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맺은 모든 관계는 파탄이 났고, 지금 맺고 있는 관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내가 만났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는 이런 관계를 맺는 일에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내가 가장 집중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명심하고 있다. 언제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내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런 관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글을 통해 관계를 끊게 된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 글을 읽는 분들은 아실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내가 상처를 받았다거나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관계에 실패했고, 그것은 영원한 관계를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다.

나는 가급적 누구와도 관계를 끊지 않는다. 특히 나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거나 접근금지를 내린 사람과의 관계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영원한 관계는 단절 없이 이어지거나 생길 수 없다. 영원한 관계는 끊어짐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거나 완성된다. 물론 그것을 직접적으로 이어주는 것은 용서다. 그 용서의 힘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단절의 경험을 통해 그 사랑을 배우고 연습하고 있다. 관계의 단절은 분노를 유발하고 저주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억제한다. 그 이유는 단절을 통과한 후에 이어질 관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단절은 영원한 관계로 가는 길이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가며 관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마침내 영원한 관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이다. 예수님이 의도했던 제자공동체의 본질은 제자훈련이 아니라 관계성이었다. 예수님의 바람은 자발적으로 택한 방식인 공동체를 통하여 영원히 희석되거나 약화되지 않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가졌던 관계를 제자들도 변함없이 동일하게 가지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그 일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기도의 내용대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인 공동체를 통해 제자들과 영원히 흐려지거나 변질되지 않을 관계인 사랑의 연합을 이루고자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런 관계를 이루셨다. 그 내용이 바로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멀리 도망가거나 떨어져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리거나 다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그 상황을 타개하시는지를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예수님은 무력하게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 티베리아스 바닷가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기억했지만 이미 돌아가신 주님의 말씀대로 한다는 것이 어색해서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했고 다른 제자들 역시 "우리도 함께 가겠소" 라고 말했다. 그들은 사실상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물고기를 잡고 있던 그들을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지적하거나 꾸짖지 아니하시고 아침을 준비하여 그들을 맞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적인 돌이킴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를 헤아리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사랑에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님이 원하시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관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여기서 그들의 좌절과 배신은 매우 귀중한 몫을 담당한다. 깨어짐과 절망을 통해 그들은 관계를 책임질 수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깨달았다. 물론 그 한계는 영원히 몸과 함께 존재할 것이지만 그러나 한 번 그 한계를 극복한 제자들에게 다음에 닥쳐올 한계를 견디거나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든 것은 그가 주님과의 영원한 관계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의 반응은 죽음이었다. 그렇다. 예수 공동체의 본질은 영원한 관계를 이루는 사랑이었다. 예수공동체의 목표는 변치 않는 사랑의 관계,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이미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비로소 주님과 영원한 사랑의 관계로 들어갔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칼 하인리히 블로흐 Carl Heinrich Bloch(1834~1890)
칼 하인리히 블로흐 Carl Heinrich Bloch(1834~1890)

유럽의 교회 종탑에 있는 닭이 생각난다. 베드로에게 닭울음소리는 영혼을 깨우는 종소리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좌절했다. 하지만 그 소리야말로 영원한 관계를 일깨우는 죽비였고 마침내 베드로는 주님과 영원한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베드로가 자신이 호언장담했던 대로 주님과 함께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면 이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인생에는 여러 이유로 나와 관계를 단절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내게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를 구할 것이다. 섭섭했거나 상처를 받았다면 진지하게 사과를 하고 배상할 것이 있으면 배상을 할 것이다. 내 편에서는 이미 용서한 것도 상대편이 들을 수 있도록 용서한다는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향해 진일보할 것이다.

그렇다. 모든 영원한 힘의 근거는 공동체적인 사랑의 관계성 속에 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관계성 위에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과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놀라운 일들이 예수님의 작은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이며 그것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과제를 제자들에게 남겼고 이제 우리들에게 남겼다.

예수공동체를 지탱하던 성령의 능력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경륜은 제자들의 사랑의 공동체로 이어졌고, 이제 우리가 그런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그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오래 기다릴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공동체를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사랑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균열이 간 코린토교회에 사랑에 관한 내용을 보냈다. 오늘도 나는 사랑을 묵상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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