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하우스 이야기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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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하우스 이야기를 시작하며
  • 주은경
  • 승인 2024.01.0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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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경의 순례여행 - 마돈나하우스 1

2007년 11월초부터 12월말까지 약 두 달 동안 캐나다 가톨릭공동체 마돈나하우스에서 게스트로 머물렀습니다. 이 글은 그때 기록했던 일기를 기초로 정리한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너무도 생생하고 깊었던 기억을 되짚어 보는 이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연재 글은 격주로 올립니다. -필자

 

2007년 12월 28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작은 시골마을 컴버미어에서 토론토로 가는 버스 안. 두 달 동안 머물렀던 가톨릭 영성공동체 마돈나하우스를 떠나던 날 단풍나무 가로수가 이어지는 눈 덮인 평원을 바라보며 나는 소리 없는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그 날 무엇이 그토록 눈물을 쏟게 했을까? 그 눈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왜 쓰는가

그 날 이후 열여섯 번의 겨울이 오고 갔다. 마돈나하우스에 지낸 시간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15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왜 지금 쓰려고 하는가?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글쓰기는 점점 힘이 드는데.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점점 이유가 분명해진다. 포기하지 말자. 끝까지 가보자.

특정 종교를 가져본 적 없는 나에게 언젠가부터 ‘영성’이란 단어가 훅 들어왔다. 그 첫 번째 계기는 다큐멘터리 기획 때문에 참가했던 2000년 불교 영성프로그램 ‘동사섭.’ 그 프로그램 5박6일 동안 가장 와 닿았던 것이 있었다. 자비와 대원(大願) 명상의 힘. 이미 이룬 것에 대해 충분히 감사하는 마음. 내가 이룬 것이 내가 아니며, 내 기쁨도 내가 아니며, 내 슬픔도 내가 아니다. 나는 공(空)이다. 내가 공의 존재일 때 더 큰 ‘나’가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몇 년이 흐르고 2007년 11월 캐나다의 가톨릭 영성공동체 마돈나하우스. 이곳에서 나는 일하고, 기도하고, 먹고, 성가를 부르며 사람들을 만났다. 비종교인으로서 가톨릭 영성을 몸으로 경험하는 나에게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주장하지 않았다. 문을 열어 환대해주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마음껏 이곳을 누려라.” 덕분에 ‘깊은 순례의 시간’을 경험했다.

순례자란 종교적인 이유로 성지를 순례하거나,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이 땅에서 나그네 같은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 하지만 내가 원한 것은 특정 종교의 순례가 아니었다. 종교를 초월해 영성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한 순례였다.

종교가 없지만 종교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국내든 외국이든 여행할 때면 절, 성당, 교회, 이슬람사원, 무덤을 찾는다. 멍 때리고 앉아 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홀로 있음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에서 깊은 고독과 자유를 느낀다. 나에겐 이것이 기도의 시간이며 일상의 삶에도 이어지길 바란다. 이러한 고요함과 평화는 타인에게도 존재한다. 그 감각을 서로 존중해야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

종교학자 길희성에 따르면 “영성은 인간에 내재하는 신의 본성이자,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능력이다.” 영성을 명확히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건강이 무엇인가, 사랑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 어렵듯이 영성에 대해서도 백인백색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건강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다 해도 그것이 우리 삶에 중요하듯이 영성도 마찬가지 아닐까?

마돈나하우스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내 인생 가장 집중했던 영적 순례의 기억을 기억하는 행위다. 힘들었지만 매순간 충만감으로 가슴 떨렸던 경험, 영성을 언어가 아닌 몸으로 느꼈던 그 기억은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이 질문을 간직하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사진출처=madonnahouse.org

마돈나하우스를 만나기까지

2007년, 나는 방송 다큐멘터리작가로 일하고 있었다. 취재 구성안, 촬영 구성안은 물론이고 때로는 눈썹 날리며 밤새 원고를 써야 했다. 긴장과 피곤이 겹치면 잠을 잘 수 없었다. 자면서도 머리로 글을 쓰고 수정을 거듭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어느 날 발바닥이 아파 걷기가 어려웠다. 이어서 발목, 허리, 어깨, 목, 편두통까지. 통증이 온몸을 돌아다녔다. 평소 다니던 내과의사는 류마티스 검사를 권했다. 다행히(?) 진단명은 섬유근육통. “특별한 원인 없이 신체 여러 부위의 통증, 피로가 지속되는 질병”이라 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는 집중력과 체력이 필수. 그런데 피디가 일하자고 연락해오면 이 몸으로 할 수 있을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 진이 빠졌다. 일을 안 하면 잊히는 게 방송계의 생리. 두려웠다. 이때 대전까지 달려가 만났던 한의사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요. 이 몸으로는 일 못하세요. 무조건 쉬어야 합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쉬어도 되는구나. 아프잖아. 돌아보니 나이 마흔 중반. 그 때까지 일하거나 아프거나 둘 중 하나였던 삶. 단호하게 나 혼자 안식년을 선언했다. 그러나 휴식도 만만치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못한다는 것, 노동력을 상실했다는 게 서글펐다. 이 시간 방송국은 정신없이 돌아갈 텐데. 나는 집안에서 무력하게 해지는 걸 보고 있구나.

내 나이 서른셋에 노동자 교육단체에서 일하다 폐결핵 초기 진단을 받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젊었고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그 후 서른다섯에 다큐멘터리 작가에 도전해 일을 해왔다.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교사아카데미도 운영했다. 그런데 이 나이에 건강을 잃고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2007년 4월이 오고 6월이 와도 내 마음은 늦가을의 낙엽 같았다. 그러다 반전의 시간이 왔다. 캐나다를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처음엔 길어야 보름 정도로 생각하다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일도 못하고 쉬어야 하는데 이 참에 오랜 로망을 실현해 보자. 외국에서 몇 달 살아보자. 1주일 만에 우당탕 짐을 쌌다. 동시에 걱정도 컸다. 혼자 뭐하고 지내지? 문득 L이 생각났다. 그가 작년 말 가톨릭공동체 어디에 2주일 있었는데 너무 좋았다고 했잖아? 그곳이 어떤 곳인지, 나도 갈 수 있는지 물었다.

“마돈나하우스. 남녀 평신도와 사제들로 구성된 가톨릭 공동체야. 일단 거기 사무실에 이메일을 보내 봐. 게스트로 가고 싶다고.”

 

캐서린 도허티
캐서린 도허티(사진출처=madonnahouse.org)

마돈나하우스? 검색을 해봤다. 청빈, 순결, 순명을 원칙으로 한 가톨릭 공동체. 1947년 러시아 출신의 캐서린 도허티(Catherine de Hueck Doherty, 1896-1985)가 설립했다. 그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난 후 러시아를 떠나 영국을 거쳐 1921년 캐나다로 왔다. 북미 평신도사도직 운동과 미국 시민권 운동의 선구자로서 1930-40년대 사회정의 운동과 '우정의 집' 설립에 참여했다. 이때 가톨릭 평화주의 노동운동가로서 환대의 집을 만들었던 도로시 데이와 뜻을 함께 했다는 것. 특히 사회운동과 영성의 통합을 위해 실천했다는 점이 나를 끌어당겼다.

당시 나의 캐나다 행은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 아파서 일을 못하는 시기에 어디든 몸과 마음이 ‘쉴’ 공간이 필요했다. 집과 일터에서 멀수록 좋았다. 일단 석 달은 몬트리올에서 영어공부도 하고 자유롭게 놀자. 그런 다음 11월에 마돈나하우스로 가서 두 달 동안 지내보자. 이메일을 보냈고 방문을 환영한다는 답신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국을 떠났다. 계획대로 마돈나하우스에 가기 전 7월말부터 세 달 동안 몬트리올에서 살았다. 못 알아듣는 영어로 대학에서 <현대 이슬람 정치사> 청강을 하고. 이민자들을 위한 언어교육 커뮤니티센터, 동네 도서관, 시립도서관, 대학도서관을 다니고. 작은 교회 큰 교회를 찾아다니며 친구들을 만들고. 몬트리올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근교 여행을 다녔다. 없는 돈에 외국생활을 하니 한 시간이 아까웠다. 나는 또 바빠지고 있었다.

하루 이틀 마돈나하우스로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10여 명의 게스트들이 한 공간에서 잠을 잔다는데 유난히 잠자리에 예민한 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캐나다 북부라 겨울에 춥고 숙소 건물은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데 난 추위에도 약하잖아. 몬트리올에서 늘 한국음식 해먹으며 살았는데 거기 음식이 잘 맞을까? 반드시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꼭 오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가톨릭도 아니고. 날씨 좋고 아름답다는 뱅쿠버로 떠날까? 거기서 맘 편히 자유롭게 지낼 수도 있잖아.

“왜 내가 마돈나하우스에 가는가?” (사실 이것은 가기 전부터 그곳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이었다.) 답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가보자.” 이게 전부였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무엇보다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영성 공동체를 깊이 경험하거나 영혼의 순례자가 되어보자는 건 후순위였다. 부끄럽지만.

드디어 11월 7일 토론토에서 고속버스를 타던 날,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가을에 노랗던 단풍나무 가로수 이파리도 다 떨어져 버린 잿빛 고속도로. 5시간을 달려 마돈나하우스 본부가 있는 작은 마을 컴버미어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세 시 무렵,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토끼털코트에 목도리, 장갑으로 무장한 채 버스에서 내렸다. 코끝이 싸했다.

나를 맞이한 사람은 작업장에서 일하다 온 듯 헐렁한 바지와 파커 차림의 체격 좋고 무뚝뚝해 보이는 50대 여성. 그는 80년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하늘색 낡은 자동차에 나를 태우고 오솔길에 접어들었다. 5분 후 하얀 목조건물이 보였다. 마돈나하우스와의 만남이 시작됐다.

<다음 이야기가 격주로 이어집니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현장을 가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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