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소유할 수 없어 ...하느님과 춤출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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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소유할 수 없어 ...하느님과 춤출 수 있을 뿐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1.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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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23

아시아의 주교들은 거룩함에 대한 감각, 완전함을 향한 갈망, 금욕에의 개방, 고통에 대한 연민, 선함의 요구, 헌신의 명령, 자아의 완전한 포기, 상징과 예식 속에 존재하는 초월에 대한 믿음이 다른 종교 안에도 있다. 하느님의 구원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강렬하게 표출되었지만,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은 교회가 주장하는 것에 한정될 수 없다.

“수세기 동안 신학은 다른 종교를 이교도의 발명품 정도로 치부해 왔지만, 이런 종교들 역시 하느님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엘리자베스 존슨은 말한다. 이 종교 안에서도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비를 엿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으며 그의 사랑은 모든 문화에 부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주교회의는 다음 네 가지 대화의 유형을 제시한다.

1. 생명의 대화 : 일상생활을 나누다

생명력 있는 대화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우호적인 관계에서 협력하며 살아가는 곳마다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서로 다른 종교를 지닌 이들이 가족이나 이웃, 직장과 시장에서 자유롭게 만나면서 이뤄지는 대화는 종교에 대한 편견을 교종하고 마음을 열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신성의 다양함을 접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샤를 드 푸코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군대의 장교였던 샤를 드 푸코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모로코에서 지질학 연구를 하다가 이슬람교도를 만나 그들의 신앙적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고 회심한 사람이다. 그때까지도 푸코는 가톨릭교회를 부녀자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에 다섯 번 엎드려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깊은 신앙은 다른 종교적 지평을 열어주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역시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 술탄을 찾아가 평화를 이루었는데, 그가 무슬림에게 발견한 것 역시 열렬한 신앙이었다. 그는 술탄에게 선물로 받은 육성으로 기도시간을 알리는 뿔나팔을 자신의 공동체에서 기도시간을 알릴 때 사용했다고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2. 행동의 대화 : 연대하다

아시아교회의 주교들은 혹독한 가난의 현실 한가운데서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 가운데 ‘행동의 대화’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종교는 세계에 대한 봉사이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는 단순히 종교영역에 머물 수 없고 경제, 사회, 정치, 문화 같은 삶의 전 영역을 아울러야 한다. 그들이 전 영역에 걸쳐 재화의 상호보완성, 긴급성, 타당성을 발견하는 것은 각 종교가 인간 공동체의 좀더 충만한 삶을 향한 공통된 헌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황을 분석하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실제적인 노력을 계획한다. 이런 행동에 돌입하면서 종교인들은 ‘함께 한다’는 느낌이 커진다. 특별히 특권층과 정치권력의 반대에 부딪힐 때, 이들은 각자의 종교 안에 있는 예언자적 태도 때문에 고난을 함께 감수하면서 연대감과 일치감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화가 상호이해의 길을 열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불교인들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의 진리를 통해 어떻게 고난을 이겨나가는지 보게 되며, 불교인들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힘을 주는지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실용적이면서 영적 교감이다. 이처럼 종교인들은 사회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연대할 때 투쟁을 위한 더 큰 힘을 얻으며, 상호간의 깊은 우정과 그들 모두를 뒷받침하는 하느님의 폭넓은 신비를 향한 새로운 통찰을 얻는다.

3. 신학적 교환의 대화:

사목자와 신학자 등 전문 종교인들이 서로 혜안과 가치를 나누며 종교적 탐험에 나설 때 신학적 대화가 발생한다. 이런 대화는 희망에 가득 찬 존경의 분위기에서 진행되는데, 서로 다른 종교전통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서로의 믿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불교에서는 긍극적인 진리를 ‘공’(空)이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주하여 ‘당신’이라고 부르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다르다. 이러한 진리 안에 사는 것은 덧없고 순간적인 모든 일시성을 일깨우는 영을 요구한다. 인간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떤 애착이라도 끊어내며 자신을 비우면서 살아가야 한다. 불교도인 일본 학자 아베 마사오(阿部正雄)는 자기를 비운 케노시스(Kenosis)의 하느님에게서 공(空)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피 2.6-8)

아베는 메시아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버렸으며, 이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셋’에서도 ‘하나’에서도 자유로운 위대한 ‘제로’라고 주장한다.

가톨릭신학인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아베의 생각에 동의하며, 불교의 시각은 인간 영혼을 하느님께 굴복시키는 딱딱한 이미지를 느슨하게 풀어준다고 했다. 이러한 발상은 중세 신비주의의 대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Eckhart)의 “나는 하느님에게서 자유롭기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급진적인 부정신학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하느님은 그저 비우시는 분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오히려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고 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인 신앙이 하느님께서 역사적 예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체험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공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부정의 부정, 즉 비어 계시지만 충만하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비교신학적 차원에서, 프랜시스 클루니는 남부 인도의 여성 성자인 안탈(Antal)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9세기 살았던 이 여성 시인은 나라야나신을 각별히 사랑했는데, 나라야나신은 그녀를 신부로 삼았다. 그때 안탈이 부른 노래는 이렇다.

“그의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것이며,
그의 백성을 기쁘게 하는 이름은 무엇이든 그의 이름이다.
끊임없이 묵상하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 길은
무엇이든 그의 길이며,
그가 바로 원반을 든 자이다.”

클루니는 “상상의 명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하느님을 향한 길을 걷는다”면서, 안탈의 결혼 이야기처럼 성 이냐시오 로욜라 역시 영신수련 과정에서 자신을 복음서 안의 한 장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곳에서 제 삶 속에서 갈급한 문제들을 예수와 나눈다. 이런 상상적 대화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여기서 상상과 사랑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더 큰 사랑과 헌신에 열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은 우리에게 와서 함께 한다. 누군가 신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은 신랑이 되어 준다.”

제임스 프레데릭스는 크리슈나와 고피(목장 처녀들) 이야기로 하느님에 대해 전한다. 신적 사랑을 대변하는 크리슈나가 밤늦게 마을에 도착해 피리로 매혹적인 음악을 연주한다. 목장 처녀들은 깨어나 그와 함께 춤을 춘다. 그런데 처녀들이 크리슈나를 차지하려고 서로 질투하기 시작하자 크리슈나는 사라진다. 처녀들이 큰 슬픔에 잠기자, 다시 크리슈나가 나타나는데, 이번엔 모든 처녀들과 눈빛을 맞출 수 있도록 크리슈나는 여러 명의 분신으로 나타난다.

프레데릭스는 “그리스도인 역시 유대인과 이교도 같은 ‘타자’들을 배제한 채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잘못을 저지른다”면서, 이럴 때 하느님은 우리 삶에서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과 춤출 수 있을 뿐이다.”

복음서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도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해서 큰 아들이 홀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탕자라 해도 아버지는 그 아들 역시 사랑한다. “예수는 세리와 춤추며 죄인들을 위해 피리를 분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종교의 이야기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을 팔아넘기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신앙을 통해 제 신앙을 풍요롭게 한다.

4. 종교적 체험의 대화

1986년 10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기도의 날에 각 종교 지도자들을 이탈리아 아시시에 초대해 함께 기도를 하였다. 그중에는 담뱃대를 든 인디언부터 유대교 랍비와 힌두 사제들도 있었다. 자기 고유의 종교전통에 따라 이들은 폭력의 중단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했다. 종교는 때로 분쟁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요한 바오로 2세는 “진실로 모든 순전한 기도자는 성령에 의해 부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성령은 신비한 방식으로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했다. 각 종교전통 속에 깃든 기도와 단식, 공동예배와 순례 등은 “신을 향한 창(窓)”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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