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이일훈, 그늘과 더불어 빛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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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이일훈, 그늘과 더불어 빛을 짓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1.0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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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짓고, 성장하면 짝을 짓고, 땅을 일구며 농사를 짓는다. 날마다 밥을 짓고, 옷도 지어 입고, 글도 짓는다. 흥겨워 부르는 노래도 짓고, 즐거우면 웃음도 짓는다. 세상살이에는 슬픔도 있어 눈물도 짓는다. 살다보면 아플 때도 있으니 약도 짓는다. 먹고, 입고, 하는 일 다 짓는 것이다. 세상에 중요한 일은 다 짓는 것이다. 세상사가 짓기의 연속이다. 그중 가장 덩치 큰 일은 집 짓는 일이다.”(<사물과 사람 사이>, 이일훈, 서해문집. 2013, 157쪽)

어쩌다 인연을 맺은 이일훈 선생님, 얼굴 앞섶으로 몇 가닥 안 남은 겨울 덤불처럼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날리고, 뒤섶은 꽁지머리를 남기고 있는 선생님을 몇 차례 뵈었는데, 이젠 고인이 되었습니다. 2021년 7월 건축연구소 후리(逅理)의 대표였던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은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에 귀의하고서 눈을 감았습니다. 마치 가톨릭교회에 남긴 그분의 건축물에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이미 하늘을 살았기에, 그분의 말년에 지은 입교는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그분의 건축적 언어는 복음서를 읽는 것처럼 마음을 울리고 지나갑니다.

“건축 행위는 망치질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동네에 들어서니 이웃을 만나는 일이고, 바람길 물길을 피하며 새 길을 내는 일이고, 하늘을 덜 가려 부끄럽지 않게 하고, 땅 위에 앉으니 대지에 짐을 얹는 일이고 ......, 건축의 마음은 집 밖을 벗어나 새로운 지형을 일구는 일이다. 아니 건축은 지형의 한 부분이다. 언젠가부터 평평한 지형만 많아졌다. 까가머리 깎듯 지형도 싹 밀어버리는 것이 편하니 만들었다 하면 다 평평하다. 볼록한 지형은 가끔 있지만 움푹한 지형은 보기 어렵다. 건축은 형태의 바깥, 외부공간에 대해서도 관심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축적 사유의 하나다.”(같은 책, 109쪽)

그분은 하늘과 땅, 내부와 외부를 모두 생각하는 건축을 꿈꾸고 일부 실현하였습니다. 믿음살이도 그와 같아서 하느님의 음성과 지상의 요청이 만난 곳에서, 내 몸/영혼을 돌보는 수행만큼 타인과 세상을 돌보는 자비로 나아가는 게 옳겠지요. 삶이란 건축이나 글쓰기처럼 나 밖에 있는 사물들과 더불어 나를 빚는 과정이며, 내 일상을 지어가는 길입니다. 내가 마음 쓰고 차곡차곡 쌓아 올린 행위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그 얼굴이 보이겠지요.

 

CPBC 다큐 동영상 갈무리
CPBC 다큐 동영상 갈무리

만석동 기찻길옆 공부방

명절이 되어야 간신히 찾아뵙는 장모님은 인천 만석동의 빌라에 살고 계십니다. 빌라 옥상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면, 서쪽으론 아파트, 북쪽으론 공장지대입니다. 그 사이에 내려 앉은 마을은 양팔을 벌리면 충분히 짚을 수 있을 만한 너비의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만 한 집들이 굴껍질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켜켜이 촘촘히 몸을 부비고 사는 낡은 마을입니다.

그 집들 사이에 옥상을 갖춘 이층 콘크리트 건축물이 있는데, 기찻길 옆 공부방입니다. 일일훈 선생님이 설계하신 이 공부방에서 ‘삼촌’이라고 불리며 인형극도 만들고, 사진도 찍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생활을 돌보는 대표 교사 부부가 제 처남이고 처남댁입니다. 명절음식을 어머니 댁에서 먹을 때도 있고, 공부방 이층에 있는 살림채에서 먹을 때도 있지요.

그런데 이층으로 올라가자면 이 동네 골목보다 더 좁고 불편한 계단을 올라가야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암벽타기를 연상시킵니다. 세상이 그들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합니다. 세상살이가 다소 불편하고 곤혹스러워도 악착같이 살자고 다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 계단 위에 놓여있는 방은 여느 집처럼 따뜻하고 밝은 창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창 너머 보이는 낮은 지붕들 위에서 길고양이들이 햇볕을 쐬며 편안한 잠을 청하며 이따금 공부방 베란다에 놓인 밥그릇에 입을 들이댑니다. 옥상에 있는 작업실과 방 한 칸. 옥상 둘레에 벽을 쳐서 이곳에선 바깥 풍경을 내려다볼 수 없습니다. 여기선 고개를 들어 하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누추한 세상의 협소한 공간이지만, 이 집은 마치 계단을 따라내려간 길이 마을로 통하듯이, 어렵사리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하늘로 열려 있는 품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CPBC 다큐 동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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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 성당

이일훈 선생님의 작품이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된 곳이지만, 경기도 이천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성 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 성당에서도 그분의 마음씀이 남다른 이유를 알았습니다. 성당 제대 뒤의 벽면 전체를 유리로 마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소통이 단절되기 쉬운 수도자와 환자들이 유리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성당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미사 중에 신자들은 성당 구조물 안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강화 동검도 채플을 지으신 조광호 신부님은 제대 면을 통유리로 넣으시고, 십자고상을 아예 유리면 바깥에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이 채플에서 묵상에 잠긴 이들은 유리벽을 통해 ‘실제로’ 채플 밖 세상에 놓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묵상한 이들은 실내에 앉아 채플 바깥에서 눈비를 맞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셈입니다.

이일훈 선생님이나 조광호 신부님이 이런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이 기술을 넘어서는 예술 안에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연남동에 있던 이일훈 선생님 작업실에 꽂혀 있는 수많은 장서들이 그분들의 철학적/신학적 깊이를 가늠하게 만듭니다. 같은 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신학원인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이일훈 선생님의 생각이 어디에 닿아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연학수사들에게 ‘불편하게 살기’를 제안하며, 본관과 분리된 별채인 경당을 짓고, 한 사람 지나기에도 어려운 좁고 어두운 복도와 공동화장실을 주문했습니다. 난간이 없는 외부 계단을 만들고, 경당 바닥엔 콩자갈을 박았습니다. “불편한 집이 수도자들의 나태함을 경계하고 ‘겸손의 복도’는 일상적인 조심스러움과 양보를 통해 겸손을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게 한다는 이유”라고 합니다.(<스페이스> 646호 참조)

“모든 건축물이 내부 공간은 밖보다 어둡다는 것은 공간을 만드는 데 장애인 동시에 매혹”이라던 이일훈 선생님은 어둠과 그늘이 깊어야 빛을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 세상의 그늘진 사람들에게 마음 쓰던 그이야말로 빛조차 아껴 쓰며 살다 간 고마운 영혼이란 생각이 듭니다. 뒤늦게 그분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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