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교 역시 하느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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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교 역시 하느님의 작품이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1.0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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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22

네 가지 선교론

이와 관련해 아시아해방신학자인 알로이스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해방신학>에서 역사적으로 지난 500년 동안 진행되어 온 네 가지 선교 유형을 소개한다.

1. 반(反)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정복론

1455년 교황 니콜라스 5세는 그리스도교도 국왕에게 “사라센, 이교도 및 그리스도의 다른 적들을 사로잡아 멍에를 지우도록 완전하고 자유로운 허가”를 내렸다. 당시 제국주의와 교회의 정책은 뒤섞여 있었다. 볼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인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니, 유럽 밖 세계의 식민화는 곧 복음화였다. 물론 선교사들의 종교적 불관용은 사탄의 지배에서 ‘불쌍한 이교도’들을 구원하려는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정치경제적 제국주의와 맞물리면서 무고한 학살을 동반했다.

2. 비(非)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적응론

예수회원 마테오 리치의 중국선교에서 잘 나타나는 태도로, 다른 문화에서 종교적 내용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슬쩍 삽입하는 방식의 선교론이다. 아시아종교의 사회문화적 형태와 종교적 동기가 선하고 복음화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졌다. 여전히 그리스도교는 구원행업의 유일한 독점자이지만, 낯선 땅에서 선교하기 위해 외피, 곧 이런 다른 문화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러나 가현설(假現說)처럼, 예수는 사람처럼 나타나신 분이 아니다. 한편 티벳이나 중국불교,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민중의 종교신심과 잘 결합되어 있다.

3. 전(前)그리스도교 종교들의 완성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며, 구원은 “하느님께서만 아시는 방법으로” 신비스럽게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는 “준비적 단계의 복음”이며, 복음에 의해 비추어지고 고쳐져야 할 존재이다. 결국 이 종교들은 “감추어진 하느님이 현존”과 같다. 타종교의 창설자나 예언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4.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성사론

모든 종교들이 “감추어진 하느님의 현존”이라면, 칼 라너가 말한대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종교인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회심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반드시 교회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힌두교도가 더 충실한 힌두교도가 되도록 하는 일이 곧 그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교도로 만드는 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느님은 부족신이 아니므로 교회의 전유물도 아니다. 만인이 하느님 백성이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 사랑과 백성(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향한다. 또한 교회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에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제 ‘산위의 마을’이 아니라 ‘반죽 속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계가 당당히 하느님의 성사가 되는 날, 교회는 다른 모든 종교와 더불어 그 존재와 역할을 그치게 될 것이다. 세계가 바로 교회가 될 것이며, 그때에 하느님의 나라는 완성되기 시작할 것이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레오나르도 보프가 지은 <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분도출판사, 1993)란 책이 있다. 가톨릭교회만이 구원을 위한 진리를 독점한다는 논리는 곧 심각한 구원론적 문제를 낳는다. 만일 그러하다면, 예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않았던 대륙에 살았던 이들은 죽기까지 온전한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채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비의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두는 것으로, 이런 하느님이 과연 하느님인가, 다시 묻게 한다.

예수는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했는데, 예수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고 구원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합당한가? 어떤 신학자들은 타종교를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완전성에 이르기 전에 취해진 ‘예비적 단계’라고 규정하는데, 이런 태도야 말로 종교적 제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존슨은 하느님은 ‘불가해’한 신비이며, 이것은 “하느님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 깊숙이 채우고 넘쳐나는 하느님의 풍족함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끊임없이 현존하면서 모든 세대와 문화를 걸쳐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완전함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크리스천만의 하느님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감히 사랑이라고 부르는(1요한 4,8.16) 알 수 없는 신비는 사랑에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모든 이들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종교와의 대화에 나설 때 필요한 신학적 방법은 ‘성령신학’이다. 전체 세계에 걸쳐 다가오고 스쳐 지나가는 하느님의 임재인 성령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고 신성에 가득 찬 은총의 선물이다. 이 성령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교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는 이들에게도 거룩함의 열매를 선사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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