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 마비된 강자는 새의 숨통을 끊어
상태바
양심이 마비된 강자는 새의 숨통을 끊어
  • 김광남
  • 승인 2024.01.01 17: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광남 칼럼
JTBC News 동영상 캡처
JTBC News 동영상 캡처

젊은 귀족 네흘류도프는 그가 소속된 부대가 이동하던 중에 고모의 저택에 들러 사흘을 머문다. 그 집을 떠나기 전날 밤, 그는 그 집에서 일하는 (그를 순전하게 연모하는) 하녀 카튜샤를 겁탈한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사에게 (마치 창녀에게 하듯이) 돈을 쥐어 주고는 임지로 떠난다. 네흘류도프가 떠난 후 카튜샤는 임신했음이 밝혀지고 집에서 쫓겨난다. 그녀가 낳은 아기는 곧 죽고, 그녀는 몇 단계의 방황을 거쳐 결국 창녀가 된다.

10년 후,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아 대지주가 된 네흘류도프 공작은 어느 살인 사건 재판의 배심원이 되어 재판소로 향한다. 그가 배심원석에 앉아 있을 때 재판의 피고인 세 명이 들어온다. 놀랍게도, 그들 중 하나가 자기가 하룻밤 농락하고 버린 카튜샤였다. 증인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자기를 알아볼까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얼른 재판이 끝나기를 바란다.

"지금 그는 사냥하러 나갔을 때 상처 입은 새의 숨통을 끊어주어야만 할 경우 느끼는, 오싹하면서도 애처롭고 괴로운 감정과 흡사한 기분을 느꼈다. 미처 죽지 않고 버둥거리는 새가 주머니 속에 있을 때, 오히려 되도록 빨리 죽여 주어 자기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싶은 법이다." <톨스토이, <부활> 중에서)

때로 양심이 마비된 강자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약자에게 베푸는 호의는 약자의 '고통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되도록 빨리 죽여서 없애는 것'이다. 약자의 고통이 보이지 않아야 자기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 사회(교회를 포함해)의 강자들이 약자들에 대해 갖는 심보가 그러하다. 억울한 희생이 횡횡하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피고인석이 아니라 배심원석의 회심이다.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