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어른이 되지 못할 어른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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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어른이 되지 못할 어른왕자
  • 김선주
  • 승인 2024.01.01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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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2024.01.01/MBC뉴스 동영상 캡처
2024.01.01/MBC뉴스 동영상 캡처

어른의 어원은 ‘얼우다’라는 동사에 관형사형전성어미 ‘ㄴ’을 붙인 말입니다. ‘얼우다’는 말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몸을 합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의 저속한 말로 섹스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남녀의 성적 교합을 단순 쾌락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남녀의 혼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얼우다’에 어미 ‘ㄴ’을 붙여 관형격을 만들어 “어룬 + 사람‘, 즉 ’혼인한 사람‘이라는 뜻을 새겼던 것입니다. ‘얼운’은 사람을 수식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목적이고 ‘얼운’은 사람을 수식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말할 때 ‘얼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운’이 변형되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나이를 논하기 전에 혼인을 한 사람은 일차적으로 자기 배우자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한 생계와 양육, 부모를 봉양하는 일까지 한 가정을 건사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으로써의 삶의 기초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어른은 일차적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자에 공감하고, 그 공감의 경계를 이웃과 마을과 나라와 세계로 확장시키는 사람입니다.

어른이라는 말에는 매우 큰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어른의 말씀을 훈계와 교훈으로 삼는 것이 사회적 덕목이었습니다. 골목에서 뻐끔담배를 피우는 청소년들에게 다가가 ‘예끼 이놈들’, ‘버르장머리 없는’ 등의 핀잔이나 훈계를 남발해도 그에 반발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른의 권위였습니다. 자기 삶의 무게를 져 본 사람은 타인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되고, 자기 자식의 굶주림을 지켜본 사람은 타인의 자식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어른은 일차적으로 가족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한 사회의 도덕적 방향을 설정하고 그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어른의 무게가 나오고 그 무게는 경박한 이기주의가 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누름돌이 되기도 합니다.

 

사진출처=radomirus.tumblr.com
사진출처=radomirus.tumblr.com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 원문에는 높임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글 성서는 높임말로 번역했습니다. 겨우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인데도 한글 성서에 나오는 예수는 우리말 높임법 중 ‘해라체’를 사용합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까지 하대(下待)를 합니다. 한글 성서 번역자들은 예수의 나이를 본 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 어른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기독교가 십자가를 인류 죄를 대속한 구원의 사건으로 본다면 그 십자가는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을 나누어가지려는 어른의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젊은 예수에게 인류와 역사를 짊어진 만유의 주재이신 하느님의 어른 되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한 사회의 도덕적 기대치는 어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어른스러운 사람을 존경하고 그에게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여 그것을 나누어서 지거나 책임지려는 사람보다 자기 이익을 우선하여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타자에게 고통을 전가한 대가로 자기 이익을 취하는 못된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라도 자기 이익에 충실하는 것을 자본주의 원리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 우리 사회의 윤리관입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한 기능적 방법을 연마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남들보다 앞서가는 데 목적을 둘 뿐입니다. 이기주의자는 휴머니즘이 없습니다. 기능적 합리주의만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는 낭만이 없습니다. 이익과 불이익이 되는 눈앞의 현상만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는 휴머니즘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인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기주의자는 타자에 대한 공감이 없습니다. 오직 자의식만이 팽배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이런 기능적 이기주의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른의 품격을 가진 사람보다 기능적 지식과 이미지를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합니다. 지난 대선에서 이대남이 이준석 씨를 선호하고 그의 정치적 노선에 따른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그가 타자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한 사회를 책임질 역량을 가진 사람인가보다 하버드대를 졸업했다는 사실과 그의 공허한 말주변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대통령과 참모들, 그리고 장차관 국무위원들이 서울대 법대 졸업과 검사 출신이라는 이 카르텔에서 자의식의 과잉을 봅니다. 자기를 객관화시키지 못하게 되면 자의식의 과잉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을 어른왕자라고 합니다.

엊그제 한동훈 씨의 법무부장관 이임식과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취임식 연설을 보았습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민망하고 불편했습니다. 죽어도 어른 되지 못할 위인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런 생각을 만지작거려 봅니다. 가정교육이 잘못된 것인지 어른왕자의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인지......

어른의 반대말은 아이입니다. 아이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자식이 예의범절을 모르고 함부로 나댈 때 그 자식을 얕잡아부르는 말이 ‘새끼’입니다. 나이를 먹었지만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을 ‘어른왕자’라고 비꼬아 말합니다. 요즘은 어른왕자 새끼가 서울대를 나오고 하버드대를 나오고 검사와 판사와 기자를 합니다. 그들에게 사람은 안 보이고 대학 이름과 직함만 보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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