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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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
  • 최태선
  • 승인 2024.01.0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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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by Léon Frédéric. 1856-1940
by Léon Frédéric. 1856-1940

가수 송창식은 <우리는>이라는 노래에서 '우리'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설한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고,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고,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고,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어서 우리는 우리다.

우리가 되기 위해서 기나긴 하 세월을 기다려 만났고, 천둥치는 운명처럼 만나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된 결과 우리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고, 마주잡은 손끝하나로 너무 충분하고,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 너무 충분하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날들을 함께 지냈고, 생명처럼 소중한 빛을 함께 지녔다.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이고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이다.

왜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공동체를 생각할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들이 아니라 ‘우리’로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은 그런 ‘우리’를 참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 가족이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혈연인 가족을 능가하는 경우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가정이 에덴이라는 주장이나 가정이 천국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복음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정과 가족이라는 관계에 파탄이 일어나게 한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이 말씀을 읽으며 신천지와 여러 이단들이 생각난다. 신천지가 되어 가족을 떠난다. 다른 이단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자식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칼은 그런 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단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혹세무민으로 만들었다. 신천지라는 단어는 거의 근접한 복음 이해를 나타내고 있지만 신천지라는 단어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거의 완벽하게 신천지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잠식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라는 말 자체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들은 복음 자체를 ‘각자도생’의 비법으로 승화시켰다. “예수 성공, 불신 실패”나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들이 바로 그런 표현들이다. 그렇게 기복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되고, 대형교회들이 되어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왕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나라들이 되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신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와의 청산, 세상 문화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거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가정이다. 가정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과거이며 세상의 문화다. 그런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즉 하느님 나라 백성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누구를 가리키면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보라. 제자들이다. 예수의 제자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 속에 가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를 잘 배운 제자들은 복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인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예수님의 요구는 가정을 원수로 만드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정이다. 그 과정을 지나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인 참된 교회, 혹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령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절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가족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세상의 사고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가족을 책임지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가족을 책임지시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그래서 복음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나’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 바로 공동체이다.

그런 우리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고, 마주잡은 손끝하나로 너무 충분하고,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 너무 충분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내가 시시한 유행가 가사를 들먹이는 것은 이 시시한 노래의 가사가 엄숙하게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대부분의 교회의 설교보다 더 진실 되고 복음의 의미를 더 충실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우리’가 되어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섬기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구현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 자신들의 교회가 공동체라는 주장을 하지 말라. 복음이 말하는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인 교회를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는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자매와 형제들이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상호복종하고 서로를 섬기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나는 괴롭다.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도 나는 공동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맘몬의 거대한 세력 앞에서 더더욱 분명해진다. 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산 위에 세운 마을”이 오직 유일한 해결책이며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가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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