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고 친밀한 엄마,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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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고 친밀한 엄마, 마리아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12.2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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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본당에서 평신도선교사로 일하면서 늘 고민하는 문제가 신학적 비전과 대중신심 사이에 놓인 거리였습니다. 제가 신학적으로 서너 걸음 앞서가면 대여섯 걸음 뒤처지거나, 아예 주저앉는 신자들을 보곤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의 역할은 신학과 대중신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마저도 연말이면 선교사 계약이 종료되지만, 그분들과 이미 맺은 관계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본당에서 오랜 시간 머물면서 거듭 새삼 확인하는 것은 성모 신심이 신자들 가슴에 자리잡은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입니다. 한밤중에도 성당 마당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만큼 간절한 무엇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레지오 마리아와 셀 모임, 세나뚜스 등 성모신심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단체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보며 신자들에게 엄마 품이 간절하구나,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들 엄마처럼 변덕스럽지 않고 늘 자비심을 잃지 않고 바라봐 주는, 내 하소연을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영원한’ 엄마 말입니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세상입니다. 언젠가 소모임에서 참석자들에게 물었죠. “나는 남을 주눅 들게 만드는 사람이 제일 싫거든요. 주눅 들면 말문이 막히고 잘 하던 일도 그르칩니다. 꽃도 피기 전에 사람을 시들게 만드는 게 주눅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제일 싫은가요?” 어떤 분이 “인색한 사람”이라더군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챙기는 사람은 흠잡을 데가 딱히 없지만 어느 이상 가까워지지도 않는 법입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지만 덕을 베풀지도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는 않겠지만, 천국에 가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 작든 크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이 필요합니다. 가족은 물론 때로는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아픔이 있기 마련이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이야기를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분을 찾다가 만난 이가 성모님입니다. 그분이라면 내 흠결까지 받아 주리라 안심합니다. 아드님의 죽음마저 견디셨던 분이라 나의 속 타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믿게 됩니다. 굳이 “바다의 별이며 천상의 모후”라는 거창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묵주기도 할 때마다 손에서 닳고 익숙한 “영원한 그러나 친밀한 엄마”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 교종은 그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복음화’라고 말합니다.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신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지만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은사를 각자의 재능에 따라 자기 삶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받은 신앙을 증언하고 새롭고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풍요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바오로 6세 교종의 회칙 <현대의 복음선교>는 “대중신심은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대중신심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과달루페의 성모’(Nuestra Señora de Guadalupe)입니다.

 

멕시코 시 인근의 테페야크 언덕에서 효성이 극진했던 후안 디에고에게 1531년 12월 9일 만삭의 모습으로 처음 발현했다는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신앙을 상징하는 어머니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성모님은 인디언의 언어인 나후아틀어로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다. 나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다. 나는 그들의 비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흘 후 후안 디에고는 과달루페의 성모를 다시 만나 성모발현의 징표인 장미 꽃다발을 받아서 그 지역 주교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장미를 보이려는 순간 그의 외투 위에 성모의 모습이 새겨져 나타났습니다. 이분은 출산을 앞둔 1미터 45센티의 작은 키의 인디언이었으며, 거무스름한 황갈색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을 지녔습니다.

<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분도출판사, 1993)에서,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마리아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원주민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는 중앙이 아니라 변방에서, 주교가 아니라 원주민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의 기쁨>에서 “구원은 제국의 변두리 작은 마을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처녀가 말한 ‘예’를 통해 우리에게 왔다”고 한 말을 되새기게 만듭니다.

“마리아는 누구에게 발현하는가?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에게 발현한 것도 아니고 교회 제도에 속한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발현한 것도 아니다. 마리아는 주변화된 어떤 원주민에게 발현한다. … 파괴된 아즈텍의 피라미드 재료로 건설한 수도의 주마라가 주교의 관저에서 마리아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아무 거리낌 없이 변방인 테페야크에서 말한다. 마리아는 후안 디에고를 선택하고 그를 애정이 깃든 애칭으로 부른다. 이처럼 정복자들에게 예속된 원주민 여성 마리아가 중앙에 사는 주교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이 아즈텍 사람들을 폭력으로 다루었던 것처럼 하지 않고, 설득한다. 마지막에는 자기 외투에서 꽃을 꺼내 주교의 발치에 뿌린다.”(보프)

과달루페의 성모는 1519년부터 1521년까지 진행된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과정에서 스페인 군대가 아즈텍(Aztec) 인디언들을 학살한 뒤에 10년 만에 발현한 것입니다. 당시 아즈텍 인디언들은 절망 가운데 마음 둘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해산을 앞둔 모습의 성모는 정복당한 인디언의 피를 나누어 받은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종족 메스티조(mestizo)의 등장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우정을 나누고 친구가 되신 것처럼, 성모님은 상처받은 인디언들과 대화를 나누시려고 인디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성모님을 흠모하는 대중의 마음은 하느님을 흠모하는 가슴이 낳은 것입니다. 해방과 구원을 바라는 우리는 이처럼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의 엄마 품을 경험합니다. 그 어머니께서 곧 은총처럼 메시아를 낳으실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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