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무력하신 하느님-처참한 삶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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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무력하신 하느님-처참한 삶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 조민아
  • 승인 2023.12.25 12: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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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아 칼럼

혐오를 비판하며 혐오하는

미국 남부 텍사스의 샌안토니오(San Antonio). 두번째 방문이었다. 십 여년 전 이 도시에 왔을 때는 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학회가 열리는 다운타운으로 곧장 왔었다. 기억 속의 도시는 화려하다. 샌안토니오 강 지류를 따라 조성된 강변 산책로가 다운타운을 가로지르고, 화려한 색감의 스페인풍 식당들이 밤낮 없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커다란 멕시칸 모자를 쓰고 전통의상을 입은 밴드가 식당을 돌아다니며 기타와 바이올린에 맞춰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

어디를 가나 활기찬 인파로 북적이고, 누구의 얼굴에도 걱정 따위는 없어 보였다. 유명한 관광지 알라모 요새는 1836년 미국의 확장정책으로 멕시코 원주민들을 학살하여 몰아낸 식민전쟁의 상처가 있는 곳이지만, 지금은 미국의‘승전’을 기념하는 샌안토니오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았다. 주민의 과반수 이상이 전쟁이 끝난 뒤 국적을 바꿔 남게 된 멕시칸의 후손이거나,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온 멕시코계 미국인들이다. 하지만 관광안내판 어디에서도 값싼 임금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고단한 삶과 미국 침탈의 역사의 상관성을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방문 기간 동안 나는 컨벤션 센터 근처 호텔 대신 도심에서 떨어진 신학교 피정센터를 숙소로 정했다. 종교학회 외에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지만, 호텔보다 저렴하고 한적한 곳이어서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전철이나 통근열차가 없어 버스를 타야 했는데, 운행하는 버스 시간이 띄엄띄엄 있어서 지도로 보기에 지척인 거리를 한 시간 반 이상 돌아간다.

대중교통 이용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적다는 뜻이다. 그들은 점점 노동의 기회와 사람들과의 교류와 일상의 소통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돌고 돌아 목적지로 가는 도로 주변에는 이런 상황을 입증이라도 하듯, 무너진 삶의 모습들이 역력했다. 낙후된 건물, 색 바랜 간판, 깨진 유리창을 방치한 상점… 다운타운과는 대조적인 도시의 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버스에는 행색이 초라한 라틴계 사람들과 흑인들이 타고 있었고, 노숙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길거리 삶을 지탱할 살림살이로 보이는 커다란 검정 비닐봉투가 그들의 이름표 마냥 옆에 놓여 있다. 맞은편 긴 좌석에 혼자 앉은 사람은 한동안 씻지 못했는지 간장을 쏟은 것처럼 검고 누렇게 변한 옷을 연신 추켜 올리며, 맨살이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몸을 긁어 댔다. 옷을 들썩일 때마다 인간의 것이라고 믿기 힘든 악취가 내 자리까지 풍겨왔다.

그이에게서 멀리 떨어진 다른 자리를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무례와 위선 중 위선을 택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내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으나 실은 간간히 들숨을 참으며 그의 냄새가 내 감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속마음을 들켜버릴까봐, 아니, 혹시라도 그가 반응하여 위협적인 상황이 벌어질까봐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그에게서 벼룩이 튀어나와 내게 붙을까 긴장하며 수비 자세로 버텼다. 혐오였다. 내가 그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은 영락없는 혐오였다. 목청껏 혐오를 비판하던 내 안에서, 그토록 취약한 이에 대한 혐오가 거침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 보였지만, 아마도 나의 위선과 혐오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와 같은 이들의 시선에 이토록 무덤덤하게 반응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모멸과 치욕을 견디어야 했을까.

 

사진=조민아
사진=조민아

가난한 그분의 만찬

버스에서 내렸다. 신학교 주변도 낙후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아침식사로 먹을 만한 걸 사려고 들린 상점엔 정크푸드와 냉동식품만 가득했다. 이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짐작이 되었다. “가장 버림받은 이들”(the most abandoned)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신학교의 넓고 쾌적한 캠퍼스는 주민들이 공원처럼 이용하도록 늘 개방되어 있다. 주민 대다수가 멕시코계인 지역답게 캠퍼스 중앙에는 과달루페의 성모동굴이 있고, 삼삼오오 모인 이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촛불을 밝히며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보다 내 눈에 인상 깊게 들어온 것은, 성모동굴과 좀 떨어진 곳에 설치된 조각상이었다. “노숙자 예수상”으로 유명한 캐나다의 조각가 티모시 쉬말츠(Timothy P. Schmalz)의 작품, “최후의 만찬”이다. 돌로 깎은 커다란 테이블 주변에 열두 개 돌 의자가 놓여 있고, 그 가운데 청동상 예수가 홀로 앉아 빵을 떼고 있다. 조건 없이 차별 없이 차려진 식탁이 교회 제단도 박물관도 아닌, 누구에게나 열린 신학교 마당에 설치되어 있다. 이런 장소를 택한 작가의 마음이 고마웠다.

비 내리고 추운 날에도, 천둥 번개 치는 궂은날에도, 예수는 그곳에 홀로 앉아 상처받은 영혼들을 기다리며 빵을 떼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 가보니 예수의 식탁엔 누군가 자기 몫의 점심을 덜어 놓은 듯 보이는 음식과 뜯지 않은 생수, 낡은 묵주, 타다 남은 초, 손바닥만한 기도서, 꽃과 십자가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다. 이 식탁에 잠시 앉았다 떠난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고단하고 아픈 일상에서 떨어져 나온,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삶의 조각들. 나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돈해 예수의 접시 앞으로 모았다. 그러다 식탁 아래 흩어져 있는, 누군가 노트 몇 장을 찢어 쓴 편지를 발견했다. 바람에 쓸려 떨어진 모양이었다.

 

사진=조민아
사진=조민아

급하게 갈겨 쓴, 어법도 틀린 글이다. 같은 필체로 페이지마다 다른 날짜가 적혀 있고, 펜의 색깔도 다르다. 적어도 서너 차례는 이곳을 찾았던 모양이다. 편지의 주인은 두 딸아이를 가진 싱글맘인 것 같았는데, 그녀는 체류증서가 없었나 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그녀에게 어떤 남자가 호의를 보이며 다가왔다. 자신과 딸들의 신변을 그에게 의탁했는데, 그녀의 딸들을 받아들인 남자는 결국 그녀를 강간하고, 큰딸마저 범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과 딸을 강간한 그 남자에게 계속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사연을 품고 그녀는 숨죽여 예수의 식탁을 찾아온 것이다.

종이가 이슬에 젖어 축축했다. 아무도 없을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을 틈타 이곳에 왔을 것이다. 말없이 홀로 앉아 있는 예수 앞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아내며 피를 토하듯 편지를 남기고 갔던 것이다. 몇 번을 그랬나 보다.

나는 편지를 모아 예수의 식탁에 올려놓고 흩날리지 않게 돌을 얹었다. 내 머리속에는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뭉쳐지지 않았다. 무슨 말로 그녀의 처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과 딸을 강간한 남성에게 여전히 삶을 맡겨야 하는 어미의 심정을. 다만 생존을 위해, 딸들을 살리기 위해 그런 선택을 내린 그녀의 심장에 무슨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그 두려움과 무력감, 분노와 설움, 수치와 자책을 감히 어떤 언어로 담아낼 수 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야 한다. 도망치듯 나는 그 식탁을 떠났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처럼. 예수만 홀로 남겨 둔 채.

나는 습관처럼 희망과 진보를 이야기하지만

샌안토니오에서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 처참한 삶의 모습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 글로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내 언어는 좁고, 얕으며, 차갑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버스에 앉아 있던 노숙인을 혐오했던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자신과 딸을 범한 이와 한 지붕 아래 누워 목숨을 부지하는 어미의 편지를 읽고 도망친 내가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따뜻하고 안전한 내 방 어느 것 하나 그들의 삶에 빚지지 않은 것이 없고, 내 식탁의 삼시 세끼에 차려지는 어느 것 하나 그들이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과 무관한 것이 없을 텐데, 감히 내가 그들 삶의 단 한 조각이라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토록 처참하게 찢어진 이들에게 과연 어떤 위로를,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당신들에게도 좋은 세상이 올 거예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 누군가의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고, 나조차 확신할 수 없는 참된 세상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희망과 위로 같은 것을 길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의 위선에 대해, 나 자신의 취약함과 불가능성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갈수록 절망이 깊어 가는 세상에 나처럼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그러면서도 “가장 버려진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스스로의 모순을 어찌할 수 없는 이들에게 쓴다. 무너진 삶들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내 통장의 잔고를 걱정하는, 생떼 같은 아이들을 바다에 거리에 묻은 부모들과 함께 울면서도 내 가족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면서도 내 자식이 성소수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잃고 낯선 땅을 찾은 난민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내 집에 불러 밥 한 끼 차리기는 망설여지는, 기후 재난으로 죽어가는 땅과 생명들을 목도하면서도 쉽게 음식을 남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편리한 소비생활에 젖어 있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쓴다.

우리는 때로 습관처럼 희망과 진보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말들이 우리들에게 던져놓은 무게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역사의 종말을 미리 보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찬란한 승리의 서사를 만들어 내며 “악”을 성토하고 “적”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 승리의 서사로부터 스스로의 어둠을 도려내고, 내 안에 숨어 있는 차별과 혐오를 외면한다. 마치 나는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나의 어둠에 데이고 상처받는 이들은 없는 것처럼, 내가 누리고 있는 안전과 풍족함은 “선한 이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그렇게 만든 권선징악의 단순한 서사에 기꺼이 미래를 건다.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물러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기라도 할 듯 환상을 품는다.

그러나 그런 변증법적 낙관처럼,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역사가 과연 있었는가?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가 지나면, 슬금슬금 꼬리를 빼며 나오기 시작하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이미 충분히 보며 살지 않았는가? 진보와 해방을 목청껏 외치며 악인들을 성토하는 와중에, 그들을 제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실은 그들의 힘을 동경하지는 않았는가? 탐욕과 기만으로 일그러진 그들을 노려보며 우리도 어느새 그 얼굴을 닮아가고, 그들의 말투를 되풀이하지는 않은가? 뉘우침을 위해 고해소를 들락거리면서도 여전히 내 반대편의 사람을 악인으로 설정하여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 상처 난 몸으로 버려진 이에게 가는

대림시기. 신앙의 새해가 밝았다. 취약하고 버려진 삶들을 바라보며, 그 삶들을 통해 민망하도록 훤히 드러나는 나의 위선과 모순을 또 바라본다. 이제 나는, 우리는, 어쩌면 그 위선과 모순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위선과 모순 때문에 흔들리는 우리 자신의 약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버려진 이들”을 더 구석으로 내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가장 버려진 이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하느님이 아니다. 긴박한 순간에 나타나 우리의 바람대로 징벌을 내리고 승리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 하느님은 무력한 하느님이다. 우리의 위선과 혐오에 치인 하느님이다. 연약한 핏덩이 아기가 되어 말구유에 누운 하느님이다. 세상을 멸하는 대신 십자가를 택한 하느님이다.

자신의 시신이 눕혀진 돌무덤조차 비운 채 상처 난 몸을 끌고 “가장 버려진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하느님이다. 총알과 빈곤으로 망가진 마을 한복판, 차가운 식탁에 홀로 앉아, 부끄럽고 슬픈 이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빵을 떼는 하느님이다.

성급한 위로와 희망을 주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판단하지도 않으며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하느님이다. 그렇게 당신의 무능과 무력을 통해 죄인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느님이다. 가장 힘없는 자들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이다. 위선과 모순을 통해 은총을 내리시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이다. 바로 그 하느님과 마주 앉아 우리 마음을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내 눈은 어디를 향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조민아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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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 2023-12-31 04:39:14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