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베름빡과 콘크리트 바람벽 사이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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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베름빡과 콘크리트 바람벽 사이에 있는
  • 김선주
  • 승인 2023.12.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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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나는 베름빡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름빡이 나를 낳았고 베름빡이 나를 길렀습니다. 베름빡의 표준어는 바람벽입니다. 바람벽은 서울이라는, 중앙을 기반으로 살아가며 교양 있는 척하는, 권력구조가 만들어낸 개념어입니다. 바람벽은 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진 벽(壁)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름빡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서사입니다. 바람벽이라는 단순한 개념을 넘어 숱한 시간과 인간사가 그곳에 눌어붙어 집이 되고 우주를 이룹니다. 바람벽엔 개념이 있고 베름빡엔 서사가 있습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죽어가는 인생살이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일들이 암각화(巖刻畵)처럼 새겨진 곳이 베름빡입니다. 부둥켜안고 살 부비며 살아가는 가족들이 목구멍과 콧구멍과 눈구멍과 땀샘에서 배출하는 소리와 냄새와 체액들이 농축되어 눌어붙은 곳이 베름빡입니다. 베름빡은 내가 이 땅에 첫 울음을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탯줄이 잘려나간 자리에 베름빡이 서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젖을 빨고 옹알이를 하며 형제들과 한 무더기 잠을 잘 때 베름빡은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싸락눈이 싸락싸락 쌓이는 깊은 겨울밤 소리를 듣고 꺽정이처럼 격정에 찬 아버지 코고는 소리를 듣고 마루 밑의 강아지가 꿍꿍대는 소릴 듣고 사랑채 곁에 있는 감나무 삭정이에 바람 지나가는 소릴 들었습니다. 잠꼬대가 심한 셋째의 뒤척이는 모습을 지켜봤고 옹기종기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우리 남매들이 개꿈 꾸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가실 때 마지막 숨소리를 베름빡이 들었습니다. 베름빡에는 우리의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름빡은 바람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써의 장치가 아니라 가족 서사입니다.

베름빡은 가족이었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존재를 느낄 수 없지만 없어지면 그 빈자리가 휑하고 쓸쓸하여 견딜 수 없는 근친자였습니다. 우리의 숨소리와 말없는 속뜻을 다 품고 병풍처럼 우릴 감싸고 있는 우주적 배경이었습니다. 베름빡에는 살과 피가 있습니다. 그 살과 피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형제라는 이름으로 운명 지워졌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족과 형제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은 서사를 공유한 사람들의 운명적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결사체입니다.

형제라는 말을 운명처럼 사용하는 것은 그 피에 공유하는 동일한 유전자에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하나의 벽 안에서 태어나듯 하나의 벽 아래 한솥밥을 먹고, 무더기 잠을 자고 골목다툼에서 한패가 되며 해가 지면 같은 지붕 아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사람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라는 말은 피를 나눈 운명적 관계라는 뜻이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근친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름빡 아래 서사를 만들어간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근친성을 느끼고 서로에 대한 책임과 연대를 죽을 때까지 지속합니다. 서사는 피보다 진합니다. 1년 내내 소식 한 번 전하지 않고 사는 형제들보다 자주 소식을 전하며 삶의 내밀한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이 근친성에 있어 훨씬 끈끈한 힘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조건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가, 삶이 공유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문서들을 보면 이 형제라는 말이 그리스도교 신조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는 현대의 뜻과 달리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서사를 공유한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형제를 말하는 그리스어 아델포스(adelphos)는 연합을 뜻하는 a와 자궁을 뜻하는 delphos가 합쳐진 말입니다. 즉 하나의 자궁(어머니)에서 태어난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이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형제 관념이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서사를 공유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서사 안에서 한 꿈을 꾸는 베름빡 공동체입니다.

베름빡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달라도 서로에 대한 신의(信義)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 못지않게 서로를 향한 신의를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 바로 베름빡 공동체의 형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베름빡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바람벽만 남게 됐습니다. 베름빡 아래서 서사를 만들어가던 형제들은 이제 신의보다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표변합니다. 형제도 없고 신의도 사라졌습니다. 베름빡 아래 웃고 울며 밥상을 나누던 따뜻한 서사는 사라지고 자로 잰 듯 규격화된 콘크리트 바람벽처럼 도구화된 이성만 남았습니다.

베름빡의 색 바랜 벽지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사람 냄새가 참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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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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