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폐휴지” 한 장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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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폐휴지” 한 장을 드린다
  • 최태선
  • 승인 2023.12.1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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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flickr.com
사진출처=flickr.com

내가 아는 노숙자 선생님이 정류장 옆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그곳은 햇볕이 하루 종일 드는 곳으로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그분은 더 이상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아마도 앞에 있는 가게에서 신고를 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혹 그분과 마주치지 않을까 인근지역을 두리번거리며 다니고 있다.

이분에 비해 폐지를 수거하시는 할머니는 입지가 공고하다. 그분은 마트에서 나오는 박스들을 정리하고 모아 수레에 담아 고물상에 넘긴다. 비가 오는 날 무거운 수레를 끌고 가는 그분을 보았다. 나는 그분을 따라갔다. 말을 걸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수레가 지나가기 어려운 지점을 만났을 때 나는 다가가 그 수레를 밀어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그분에게 오만 원짜리 한 장을 드렸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연신 내게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했다. 핸드폰이 있으면 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자 핸드폰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그 마트에 오면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로 간헐적으로 그분에게 돈을 드리고 있다.

그런데 돈을 드릴 때 나는 늘 “폐휴지” 한 장을 드린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분을 공경한다는 의미를 담아 돈을 봉투에 넣어 드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폐휴지를 한 장 드린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성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그분에게 돈을 드릴 때는 폐휴지 한 장이라는 말과 함께 돈을 드린다. 그분은 이제 내가 폐휴지를 드릴 때마다 이제 그만 주시라는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폐휴지 모으시지 않으시냐는 반문과 함께 그것을 드리면 수십 번 복 받으시라는 말을 녹음기 틀어 놓은 것처럼 반복한다. 나는그 복을 다 받으면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다.

내가 이분들 생각이 난 것은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다는 예보와 함께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난방비 한 푼을 아끼기 위해 손자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한 시간만 난방을 가동시키는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오늘도 그분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오만 원짜리를 폐휴지 한 장이라고 말할 때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성령의 감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머무시는 성령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선언인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모시는 성령의 성전이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아 모시면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나는 돈을 폐휴지라고 말함으로써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것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일인지 아는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을 읽고 공감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그분들을 만나고 싶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많다. 하지만 돈을 폐휴지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은 보기 어렵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직접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을 폐휴지로 여기지는 못하더라도 폐휴지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은 적어도 성령의 성전이 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내 자랑이 아니다. 내가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만일, 돈을 폐휴지로 생각할 수 없다면 십 중 팔구 그 사람은 성령의 성전이 아니다. 내 스스로 단정을 짓는 것이 아니다. 내 경험을 절대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니 달리 보이는 말씀이 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성전이 되지 않으면 재물의 영인 맘몬의 영을 받아 맘몬의 성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예배나 미사를 진지하게 드려도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맘몬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교회들을 바라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많이 벌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어떻게 돈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활개를 칠 수 있는가? 어떻게 교인들이 많아져서 가난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아니 다른 무엇보다 어떻게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어제 한 이혼 전문 변호사가 결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잠시 들어보았다. 결혼의 관건은 경제력, 즉 돈이었고, 이어지는 결혼생활 역시 돈이 좌지우지 한다. 돈이 없으면 결혼도 하지 못하고 돈이 없으면 결혼생활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경제력이 대등하지 않으면 차별이 일어난다. 경제력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돈은 철저하게 계급을 만들어 사람을 차별한다.

처음에는 그것을 들으며 내가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을 좀 더 들으면서 내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아무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내가 알게 된 복음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경륜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모든 부가 모이던 로마였지만 로마는 이런 사람들을 당할 수 없었다.(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급기야 로마는 신앙의 자유라는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맘몬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맘몬은 교회 안에 돈을 풀어놓음으로써 이렇게 확고했던 그리스도인들을 녹여버렸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된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풀어져버린 맹탕 그리스도교다. 만두의 껍질이 없다면 만두는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오늘날 교회는 껍질이 녹아버려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만두전골처럼 되었다. 알맹이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국물에 섞인 알맹이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알맹이를 지닌 채 맘몬의 성전이 되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오만 원짜리를 폐휴지라고 말하게 하신 분은 성령이었다. 내 자랑이 아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나는 돈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움직여 돈을 폐휴지라고 말할 수 있게 하신 이가 내 안에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에게 가난하게 해주십사는 기도를 드리게 하시고 나를 가난하게 만들어 가난하게 살 수 있게 해주신 성령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스도인의 시작은 가난이고, 과정 역시 가난이고, 마지막에는 가장 가난해지는 곳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의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성령의 성전인가, 맘몬의 성전인가?”

이 해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솔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확인해보자.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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