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매듭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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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매듭 “미안합니다”
  • 최태선
  • 승인 2023.12.0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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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예수기도를 한다. 그런데 어제는 페달을 밟으며 “미안합니다.”를 읊조렸다. 생각해 보니 내 삶 전체가 미안한 일들뿐이다. 새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운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모든 것이 미안했다. 특히 내가 내 힘을 내세워 폭력적이었던 과거의 행동들이 미안했다.

그렇다. 나는 거만했고, 나는 폭력적이었다. 신앙의 삶을 통해 많이 순화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런 부분이 남아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삶 전체가 모두 미안한 일들뿐이었다.

아마도 연말이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도 그렇다. 적어도 인생을 정리할 시간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내게 다가와 친밀감을 표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런 분들에게는 더더욱 미안하다. 하지만 이미 떠난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문명의 이기(利器)들은 그러한 현상을 돕는다. 예전에는 그렇게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안 만나거나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요즘에는 접근을 아예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때문이다.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일들이 막상 일어나면 많이 아픈 것이 사실이다. 사랑이 크면 아픔도 크다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대사가 실감난다.

그래도 이제 그런 일에 화가 나기보다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실망시켜서, 아프게 해서, 주제넘게 굴어서, 상처를 주어서, 모멸감을 주어서, 마음을 읽지 못해서, 등등 미안함의 이유는 많다.

그리고 새삼 용서라는 복음의 요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우리 사이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존재와 소유를 다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의 헌신에 의해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으로 형성된다. 그와 같은 헌신은 우리 자신과 서로를 더 잘 알게 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점점 더 많이 경험하게 할 것이다.

물건 버리듯 관계마저 폐기하는 사회

우리가 깊은 신앙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파편화된 우리의 삶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마음에 들면 좋아하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곧바로 폐기에 들어간다. 소비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습관이 관계마저 갉아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관계를 일회용으로 만든다. 사실 돈만 있으면 관계 역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정상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오래된 물건, 특히 내가 오래도록 사용한 것들일수록 버리지를 못한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힐난한다. 좀 버리며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사용한 것들,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버리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애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관계의 단절에 더 큰 아픔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용서라는 매듭 또는 접착제

어쨌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라는 하느님 나라의 매듭 혹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련 없이 버리는 것에 익숙해져서 굳이 “용서”라는 불편한 시간을 가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 용서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우리를 지탱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용서할수록 매듭이 지어져서 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어쩌면 그 매듭이 없어서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용서하는 관계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생각할수록 용서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란 결론에 이른다. 서로 잘못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큰 기쁨인가. 부부가 사랑하는 것은 날마다 싸우고 용서를 반복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단순히 인간관계만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사랑은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되고 실천된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렇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용서를 남용할 것이라는 끔찍한 위험을 감수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남용하고 또 남용한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수준까지 낮아지셨고, 우리가 그분을 상처입히도록 허락하셨다. 결국 이 모든 용서가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며, 우리가 이 놀라운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변화될 것임을 믿으셨다.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받는지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기

새삼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자매와 형제로서의 공동체가 있어야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를 실천하면서 더 깊은 관계로 날마다 조금씩 진보를 이룰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공동체가 없으니 마음에 안 들면 떠나거나 관계의 단절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늘 자매와 형제로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를 원해왔다. 하지만 공동체 없이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구하는 것과 같다. 용서의 과정 없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느님이 그러셨듯이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영화 <밀양>에서 보는 것처럼, 때로 용서를 남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새삼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용서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살아갈 때 그곳은 땅 위의 하느님 나라가 된다. 그리스도교에서 공동체가 사라지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될 수 없다. 단순히 비용을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화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극도로 강력해진 개인주의 속에서 공동체를 언급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공동체를 이루려면 경제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개인주의에 더해 경제적인 것이 더해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우리 시대에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공동체가 없다면 우리는 용서를 경험할 수 없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알 수 없고, 우리의 신앙은 허울이 될 수밖에 없다. 혹시 나를 떠났던 분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나를 용서하고, 나 역시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라고 부탁드린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미안합니다.”
먼저 용서를 구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마태 18,22)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용서가 일상이 되는 공동체가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벌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반복되는 용서를 통해 하느님을 알아간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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