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악기 장인, 김영익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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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악기 장인, 김영익 선생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11.2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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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가문비 나무의 노래>, <바이올린과 순례자>, <울림>으로 이어지는 책을 통해 순식간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바이올린 제작자 마틴 슐레스케(Martin Schleske)였습니다. 마틴은 악기를 만드는 장인일 뿐 아니라, 내가 문득 발견한 영성작가이며 나를 새삼 놀라게 하는 신학자입니다. 이 분의 인생에서, 반복적으로 신선한 영감을 불러일으켜 왔던 라이트모티브(Leitmotiv)가 된 것은 오스트리아 화가였던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 1928~2000년)가 남긴 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삶에 대한 비유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내적 깨달음을 얻는 건 고사하고, 더 이상 우리 주변과 우리 안에의 사건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 그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중단했다. 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사실 죽었다. ... 오래전에 썩어버린 인식들을 갉아먹으며 살아갈 따름이다.”

훈데르트바서는 우리 주변과 우리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틴 슐레스케는 악기를 만드는 작업실에서 그런 거룩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무디게 쓸려나가는 나뭇결 속에서 연마되지 않은 내 삶의 연장에 대해 성찰합니다. 일상에서 계시의 순간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종종 이런 말로 끝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서 들어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우리 믿음이란 것도 단번에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늘 새롭게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차츰차츰 또렷해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고난을 통해 울림으로 재탄생하는 가문비나무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이, 나와 내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게 내 믿음의 경로라면, 바이올린 제작자들에겐 고지대에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곳에 곧추선 가문비나무들은 아래쪽엔 가지가 없고 아주 위쪽으로 올라가서야 가지가 뻗어 있다고 해요. 아래에서 40~50미터까지는 가지 없이 쭉 뻗은 나무라는 거지요.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의 공명판으로 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나무는 없다고 감탄합니다.

산속에 있는 이 가문비나무들은 200~300년 동안 천천히 성장하면서 아래쪽 가지를 포기합니다. 윗쪽 가지는 빛을 향해 위로 뻗어나가고 아래쪽 가지는 사멸합니다. 아래쪽엔 더 이상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목한계선 바로 아래에서 자란 나무에게 척박한 땅과 기후는 고난이겠지만, 울림에는 축복이 됩니다. 위기를 통해 단단해진 나무는 바이올린을 통해 울림의 소명을 얻게 됩니다. 바이올린으로 거듭난 나무는 공명판을 통해 울리고, 울려서 그 곡조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바이올린 제작자가 좋은 나무, ‘노래하는 나무’를 발견한 덕분입니다.

 

류트 공방 김선생

마틴 슐레스케를 생각하면, 그래도 기분은 참 고상하다, 느껴집니다. 우리 동네에도 몇 달 전까지 류트 등 고전악기 제작자 이웃이 살았습니다. 김영익 선생님입니다. 파주이마트에서 당하리 언덕 우리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그분의 공방이 있어요. 월세 이십만 원짜리 허름한 공방이지만, 이곳에서 일하시는 김선생님은 환대의 기풍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습니다. 동네 사랑방처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서로 안부도 묻고, G7 블랙 퓨어블랙 인스턴트커피도 얻어 마시는 공간입니다. 그곳엔 언제나 편안한 웃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손끝이 야무진 그분과 인연이 닿은 사람들은 나처럼 복이 있습니다. 그분의 관심사가 류트 제작뿐이 아니라서 사방팔방 아는 것도 많고 재주도 많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사소한 일도 그분게 묻고, 자잘하게 고장 난 물건들은 이분이 고쳐주기도 합니다. 예전에 타고 다니던 제 자동차 뒷바퀴 흙받이커버의 철판이 녹슬고 부서져 내렸을 때, 김 선생님은 카센터에 갈 필요 없다면서 양철판을 잘라서 메워주고, 차량스프레이로 도색도 해주었습니다. 물론 무보수입니다.

그분의 철칙은 적게 벌고 적게 쓰는 방향으로 살자는 것이지요. 소소하지만 알짜배기 삶의 지혜로 주변을 기쁘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가성비 높은 한식부페가 어디인지도 꿰고 있는 그분과 함께 살면 가난해도 기분 좋은 삶이 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현실을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생애를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만 같습니다.

세심한 배려, 소소한 행복

<미스 럼피우스>, 바버러 쿠니 글그림, 시공주니어, 2017

공방 처마에는 해마다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삽니다. 공방에 갈 때마다 제비들의 근황을 알려주던 김선생님은 봄마다 나팔꽃도 심습니다. 제 땅이 없으니 남의 집 담장 밑에 씨를 뿌리고, 나팔꽃 덩굴이 타고 올라갈 끈도 묶어 줍니다. 때가 되면 공방 인근에 나팔꽃이 사방에서 피어납니다. 악기를 연주하고 만드는 과정 전체가 너무 좋다는 김선생님은 늘 편안한 얼굴입니다.

악기를 만드는 일이 생계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악기를 수리해 주고 피아노 조율을 해주면서 먹고 산다고 말하더군요. “먹고만 살면 되는 거 아냐. 모든 과정이 그냥 다 좋아.”라고 말하는 그분을 보면 <미스 럼피우스>라는 동화책이 생각납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그 일 때문엔 주변이 행복해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인생은 없을 테지요.

아마 보육원 출신 류트 제작자는 이분밖에 없을 듯합니다. 이분이 제게 해 준 친구 이야기는 딱 한 명뿐입니다. 보육원 동기가 이런저런 이유로 교도소에 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냐는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한번은 그 친구에게 교도소로 책을 넣어달라는 부탁이 왔다기에, 제 책장을 뒤져 적당한 책을 골라 보내준 적도 있습니다. 안착하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그 친구에게 김선생님은 후견인처럼 보였습니다. 이미 맺은 인연들을 손 놓지 않고 돌보는 마음이 따뜻합니다. 세심한 배려 때문에 나같은 이웃들이 소소한 행복을 얻어 누립니다.

김영익 선생님은 공방 문을 닫고 지난 여름에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떠났습니다. 하나 있는 딸 아이가 아버지처럼 악기 제작자가 되고 싶어 한 모양입니다. 아버지처럼 밀라노의 기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던 것이지요. 그곳에서 아이 뒷바라지하러 간다고 합니다. 밀라노에 있는 공방 여러 군데에 일자리를 수소문 해 보았다는데,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음 좋겠습니다. 환경과 조건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선생님이기에 어디서든 행복한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안심합니다.

 

*<경향잡지> 2023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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