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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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
  • 최태선
  • 승인 2023.11.2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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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글을 쓰다보면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건망증 비슷한 것이 매우 심각해졌다. 아는 것도 생각이 안 나거나 아는데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거나 알고 있던 내용들이 뒤섞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글을 쓸 때는 특히 뒤섞이는 것이 말썽의 소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내 머리 속에서 성인 공경과 성물 숭배가 혼합되어 "성인 숭배"라는 말을 사용했다. 내가 사용하려던 단어는 "성인 공경"이었다. 그런데 그 글이 매체에 실렸다. 그리고 내가 사용한 성인 숭배라는 표현을 문제 삼는 이가 등장했다. 자신들은 성인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는 것이고, 개신교 신자인 내가 가톨릭 교리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글을 썼다는 취지의 항의 글을 댓글로 단 것이다.

말은 물처럼 한 번 엎지르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말은 화살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해석을 할 수도 있고 그 말에 담겨 있는 본의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글의 경우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말보다 더 심각한 경우를 맞게 된다. 내가 아무리 성인 공경을 성인 숭배라고 잘못 표현했다고 말해도 글의 경우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맞다. 분명 실수였고 잘못이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것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지 않는다. 특히 나와 다른 견해를 자기고 있거나 위에서 보듯이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성인 숭배라는 표현은 분명 내 실수였다. 내 본래의 의도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내 실수도 사용하신다. 새삼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삼으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나는 실수하지만 하느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내가 저지른 실수나 잘못도 주님의 손을 거쳐 선의 도구 내지는 재료가 된다. 나는 성인 공경, 혹은 성인 교리를 성인 숭배라고 쓴 실수를 저질렀지만 생각해보면 성인 숭배는 잘못 사용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사실이야말로 눈 감고 아웅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경과 숭배라는 차이를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구약 성서의 “구리 뱀”일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구리로 만든 불뱀을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불뱀을 공경한 것이지 숭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불뱀을 만들라고 하신 야훼를 숭배하는 것이지 불뱀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내 노화를 사용하셔서 내 실수로 정곡을 찌르신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내 삶을 완성해주신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의미이다. 전지전능하지 않은 인간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 행동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내게 주어진 삶의 기회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물론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주님께는 예외가 될 수 없다. 주님은 그런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삼으신다.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자유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돈이 제공하는 자유만을 자유로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리가 주는 자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그러나 돈이 주는 자유와 비교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1세가 죽으며 마지막 남긴 말이 생각난다.

“이 모든 것(소유)으로 단 일 분만이라도 살 수 있다면 … ”

그렇다. 돈은 유사전능성을 가지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돈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하지만 돈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한다면 영원한 생명이다.

돈으로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다. 우리는 몇 년 간을 침대에서 살았던 이건희 회장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돈 때문에 죽지도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재벌들만이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잘 죽지 않는다. 생명연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숨을 못 쉬기 전에 생명 현상이 끝나는 것은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물을 삼키지 못하면 생명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의학은 그런 사람에게 삽관을 하고 영양을 공급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명을 연장해도 그 생명은 온전한 생명이 아니고 온전한 생명이 될 수 없다. 코마 상태의 와상환자의 생명은 자신들이 원하는 생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돈이 사람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돈이 지닌 유사전능성으로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을 인간의 욕망으로 제시했지만 불가에서는 두 가지를 더해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권력욕). 수면욕(편안함)을 제시한다. 인간의 욕망은 인간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매슬로우는 욕망의 5단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순환의 과정을 거쳐 나선형의 계단을 오른다. 결국 인간 자체를 욕망하는 존재로 정의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이러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진리로 제시한다. 그리스도교의 진리 역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곧 진리이다. 그리고 그 진리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다. 하느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느님과 돈 가운데 하나를 주님으로 선택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하느님의 종이 되느냐, 돈의 종이 되느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물론 그런 인간의 상태에서의 자유를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런 자유가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자유의 경우도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다. 공통점 역시 존재한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종이 되어 욕망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다. 나는 더 이상 욕망을 좇는 삶을 살지 않는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욕망의 존재라는 내 존재의 한계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하나님이 주님이신 삶이다. 그런 내 삶은 하느님의 통치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추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삶은 오직 하느님 나라의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는 넘어지고 실수하는 삶을 산다. 때로는 다시 욕망에 굴복하거나 빠지고, 때론 돈에 현혹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한 주님이신 하느님은 나의 그런 모든 삶을 선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느님 되시는 것이며 전능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오늘도 내 실수를 통해 주님이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신 나의 주님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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