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이 닿는 투쟁,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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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이 닿는 투쟁, 독서
  • 진용주
  • 승인 2023.10.3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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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용주의 사진 그리고 적막함
고트하르트 쿠엘, 뤼벡 고아원(LÜBECK ORPHANAGE), 뤼벡 미술문화사박물관 소장.
고트하르트 쿠엘, 뤼벡 고아원(LÜBECK ORPHANAGE), 뤼벡 미술문화사박물관 소장.

가을은 독서의 계절! 가을이면 어디서나 만나는 말인데 실상은 말과 다르다고 한다. 서점들의 책 판매 통계에서도, 또 도서관의 대여 통계에서도 가을이 오히려 책을 덜 읽는 철이라고. 들로 산으로 강과 바다로 쏘다니기 좋은 철이니 책에 눈길이 덜 가는 게 당연하다 싶다.

그래도 세상의 좋은 풍경 중 하나는 열중해 책을 읽는 모습이 아닐까. 독일 화가 고트하르트 쿠엘(GOTTHARDT KUEHL, 1850-1915)은 초기 독일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오래도록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쿠엘의 1894년작 <뤼벡 고아원(LÜBECK ORPHANAGE)>은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책을 읽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은 작품이다.

화면 안의 다른 소녀와 소년들은 체스를 두거나 장난감을 만지거나 하며 모두 다른 뭔가를 하고 있고, 오직 한 소녀만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책 읽는 소녀의 맞은편에 앉은 소녀는 꼭 스마트폰을 들고 뭔가 문자를 보내거나 SNS의 피드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고아원의 고단한 현실을 잠시 잊는 재미난 이야기에 빠져 있는 것일까, 어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지식과 교양을 쌓으며 현실에 맞서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소녀의 독서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영국 시인 아서 휴 클러프는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마라/노력과 상처가 부질없고/적은 약해지지도, 패배하지도 않았으며/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지 마라”라고 시작하는 시를 썼다. 공상으로의 도피건, 자격을 갖추기 위한 실용적 독서건 고아 소녀의 독서는 투쟁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마침내 유용했을 것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진부해도 그 말에 믿음을 보탠다.

 

진용주 
<우리교육> 기자, 디자인하우스 단행본 편집장 등 오랫동안 기획, 편집, 교정교열, 디자인, 고스트라이팅 등 여러 방법으로 잡지와 단행본을 만들며 살았다. 책을 만드는 것만큼 글을 쓰는 일도 오래 붙잡고 지냈다. 장만옥에 대한 글을 쓰며 남에게 보이는 글의 고난을 처음 실감했다. 덴마크 루이지애나미술관에 대한 글을 쓰며 미술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들지 않을 때 여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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