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어떤 복음서를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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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어떤 복음서를 쓰고 있는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10.2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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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킬럼

제가 만난 출판인 가운데 특별히 마음이 가고 존경하는 분이 홍승권 선생님입니다. 장일순 평전 작업 때문에 서울 연남동에 있는 삼인출판사에 들렀는데, 마침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에서 영성신학과 구성신학(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조민아 선생님이 여기서 출판한 <일상과 신비>이란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 책은 많이 나갔나요?” 묻자, 홍 선생님은 “글쎄요. 한 오백 권 정도 나갔어요.” 나도 아직 사서 읽지 못한 탓에 민망했습니다. 평소 한국가톨릭에서 내심 가장 존경하는 평신도 신학자를 꼽으라면 주원준 선생님과 조민아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당장에 책을 읽어보서 찬탄하며 “그렇지!” 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길어 올린 신학과 신비를 이처럼 깊디깊은 마음으로 이다지도 아름답게 묘사한 글은 참 오랜만에 발견합니다. 당장에 30권을 주문했습니다. ‘요한복음 묵상’을 수강하는 본당 신자들과 헨리 나웬의 <돌아온 아들>로 강독모임을 하고 있는 동무들이 기쁘게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강독교재로 이 책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신학자는 아니어도,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조민아 선생님이 신학을 하고 글을 쓰면서 발견한 ‘환희’를 맛보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그 기쁨과 슬픔에 중독되어 지금껏 신학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묻는 시간이었습니다.

“글쟁이들은 흔히 자신의 직업을 일컬어 축복이자 천형이라고 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버린 형벌로, ‘그 보아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곧 떨어져 내릴 것이 분명한 무거운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오리는 시시포스처럼 덧없는 노동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을 보살해 주는 것은 오로지 아득한 언어의 바다에서 반짝이는 심상心象 하나 건져올리는 찰나의 기쁨뿐이다. 그러나 은빛 비늘 펄떡이는 고기와도 같은 그 심상은 수면에 떠오르자마자 가뭇없이 빛을 잃고 만다. 참으로 글쟁이들의 환희(ecstasy)는 섬광처럼 강렬하지만 공기처럼 가볍고, 터질 듯한 기쁨인 동시에 가눌 길 없는 슬픔이다.”(일상과 신비, 여는 글)

신학함(doing theology)이란 무엇인지 처음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있습니다. 에밀리아나 수녀님입니다. 벌써 삽십 년이 족히 지난 일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얻은 첫 직장은 함세웅 신부님과 함께 했던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였습니다. 1991년에 열린 ‘노동헌장 반포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나는 레오 13세 교종이 반포하여 가톨릭사회교리의 효시가 된 <노동헌장>(Rerum Novarum, 1881)의 정신이 한국교회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살피는 발제를 준비하였습니다. 이참에 한국교회사를 훑어보면서, 처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늘 ‘노동신학’을 하고싶다는 열망을 지니게 되었는데, 마침 필리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노동사목을 하던 에밀리아나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수녀님에게 노동신학에 관한 자료가 있는지 물었고, 수녀님은 ‘어느 노동자가 당신에게 노동신학을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내가 왜 노동신학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호사가들이 행하는 학문적 관심을 넘어서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실효성 있는 신학을 요청한 것이지요. 그날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부끄러워서 붉어진 낯으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정작 나는 아직 노동자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노동신학을 하려면 노동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절실하게 고백할 때, 그게 노동신학이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신학(theologia)이란 직역하면 ‘하느님(theo)에 대한 이야기(logia)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 이야기를 통하여 세상을 읽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다른 이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조민아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고, 의식적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 활동을 한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사제와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모든 신앙인은 넓은 의미에서 신학자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서들이 마르코와 마태오, 루카와 요한의 복음서인 것처럼, 우리 자신의 고유한 복음서를 써 내려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에 가깝습니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 삶의 자리에서 체험한 하느님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누구나 투박한 말씨로 떠듬거리면서도 발음(發音)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글과 그림, 춤과 노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조민아 선생님은 “한 인간의 마음에 신앙이 새겨지는 순간은 하느님과 그이만의 독창적인 서사를 간직한 하나의 신학이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조민아 선생님은 <신비와 일상>에서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하느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어 “당신의 삶, 당신의 일상이 곧 하느님이 세상을 향해 풀어놓은 이야기라니, 가슴이 설레이지 않는가” 묻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입술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 이야기를 풀어놓으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이며,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 가운데서 거니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이야기가 하느님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살면 그분은 자비이시고, 우리가 공평과 정의를 실천한다면 그분은 의로운 분으로 드러납니다. 결국 신학이란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언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색채로 우리들의 복음서를 쓰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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