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색이 끝난 자리에 비로소 시작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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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색이 끝난 자리에 비로소 시작되는 신앙
  • 최태선
  • 승인 2023.10.2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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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내가 가는 길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가는 길은 상상 속에 존재하다 아무런 성취도 없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곧 길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상상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불가능하다. 복음이 말하는 순수한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 없다. 성서가 이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완성된 하느님 나라는 마지막 날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러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땅에서의 노력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톰 라이트와 같은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노력들은 하느님 나라의 벽돌과 같이 하느님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신앙은 신비이다. 신비가 없다면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 나라 역시 신비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사유가 아무리 뛰어나고, 그 실천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그것은 신비일 수 없다. 거기에는 단절과 초월의 순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모든 사색이 끝난 후에 비로소 신앙은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갑작스런 도약이나 무책임한 회피가 아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신비다. 그리고 그렇게 신비가 신앙에 자리할 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신비가 신앙 안에 자리하는 한 신앙은 불가능하다. 누구도 신앙을 완성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사실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이 만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곧 이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 사실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사유 속에서만 가능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J. Kirk Richards, The Road to Emmaus, 2011. Oil on panel.
J. Kirk Richards, The Road to Emmaus, 2011. Oil on panel.

현실에 절망한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순수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묵상하는 것이다. 순수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이자 사명이다. 그 그리스도인이 누구이던 반드시 그 일에서 실패할 뿐이다. 하지만 그 실패는 톰 라이트가 말한 대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실천이 결정체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실천하는 방식은 복음이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내게 도움이 된 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다. 그들은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화두는 해체와 탈구축을 통한 새로운 구축이다. 모든 것을 허물어야 새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먼저 해체가 선행되어야 하고 탈구축이 이루어져야 한다.

"탈구축은 초월적-현상학적 기술의 필증성을 의문시하지 않으며, 현전의 토대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데리다)

아리송한 해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복음이 바로 그와 같음을,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와 같음을 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 길을 간다.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가 나를 떠나거나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가는 길이 본래 그런 길이다. 내가 가는 길의 특성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하는 해체와 탈구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곧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다. 그런 신앙은 현실을 도외시한다. 그리고 현실을 도외시하는 신앙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이해받기를 원한다면 이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내가 제도적 교회를 떠나게 되고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멀어지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가는 길은 결과적으로 가장 ‘교회답지 않은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나는 정형화된 어떤 교회도 공동체도 제시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추구하는 교회와 공동체에서 끊임없이 모순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길에서 믿을 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밖에 없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개입이다. 그 일에서 중요한 것은 가난이다. 이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이나 경제적인 가난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탈교회’ 혹은 '영원히 미완성인 교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내가 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교회가 최선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그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돌이켜 성찰하며,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며 이 길을 간다.

결국 그 일은 내게 주어진 실험의 기회이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최선을 다할 때 그 결과가 아무리 유치하고 초라해도 하느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가는 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교회)의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세속적으로’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런 내게 가장 힘이 되는 사람들은 아미시와 후터라이트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여전히 ‘이상한 사람들’, 혹은 ‘게토화 된 그리스도인’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자유의 길을 가고 있는 선각자들이기 때문이다. 매우 단순하고 유치해보이기도 하지만 그 단순함과 유치함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는 묘책이다.

손자 녀석은 내게 그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녀석은 내 사랑을 무기로 내게 무리한 요구들이나 매우 이기적인 요구들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가능한 방법으로 녀석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준다. 그리고 우리는 손자의 억지를 통해 같이 행복해진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하느님은 내 어리석은 요구나 시도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나는 하느님을 믿고 어리석은 내 사유를 이어가면서 세상에서 가능한 일들을 도모한다. 지금은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며 기다리거나 노숙자 선생님이나 폐지를 주워 파시는 분들을 섬기는 일로 세속적인 실험을 하고 있지만 이 일이 하느님의 손길을 통해 어떤 일로 변할지를 나는 알 수 없고, 동시에 그 알 수 없는 일을 기대한다.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구분하지 않고 오직 기다림, 다시 말해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바라보며 내가 가는 길을 갈 것이다. 때론 내가 하는 일이 내게도 올무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곧 해체이며 탈구축의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교회 같지 않는 교회, 그리스도교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교회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이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이 막연하지만 않은 것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고 그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All mine to give", 이것이 내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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