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몬에 대적하는 생명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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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몬에 대적하는 생명의 하느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10.15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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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12

수십년 동안 유럽교회의 장상들과 신학자들은 세속사회와 무신론에 대항해 왔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무신론자나 비신자가 아니라 생명을 얻으려고 투쟁하는 비참한 인간에게 주목하였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비인간적 상황과 투쟁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고백하느냐가 문제였다. 결국 해방신학의 투쟁 대상은 ‘우상숭배’였다.

A Theology of Liberation by Dominican priest Gustavo Gutierrez

상숭배는 성경의 진실한 하느님 앞에 낯선 신들을 데려오고 전혀 신적이지 않은 것을 경배하는 행위이다. ‘맘몬’이라 부리는 이 신들은 ‘돈’이며, 돈이 가져다주는 만족이며, 그 돈을 벌고 유지하기 위한 권력이다. 스페인 정복자에게서 시작된 이 우상은 지난 5세기 동안 주류적인 사회시스템이었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탐욕은 돈을 신격화하여 절대적인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 맘몬은 희생자를 요구하며, 그 희생제물이 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이다. 해방신학에 와서야, 불의에 직면하여 중립적인,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며, 계급차별적인 하느님의 이미지는 철폐되었다. 그동안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는 사회-교회 지배층이 왜곡시켜 온 우상과 충돌하며 성경이 지시하는 하느님을 복원시켰다.

가난한 이들과 지배자들을
동시에 해방하는 하느님

그러나 하느님을 꼭 가난한 자들을 당파적으로 선택하는 하느님이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하느님 사랑은 배타적이지 않으며 보편적이다. 이 보편적 사랑은 사회적 불의로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억압하는 자들의 회개를 사랑으로 요청한다. 하느님의 구원은 양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루카 1,50-53)

마리아의 노래에서 보듯이, 비천한 이들은 끌어올려지고, 배고픈 자들은 좋은 것으로 채워지면서, 한편 통치자들은 왕좌에서 물러나고 부유한 자들은 빈손이 되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성취된다. 구원의 잣대는 “자유케 하는 사랑”이다. 그 목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위치만 바꿔 새로운 억압의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하느님 자비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그들이 받은 고통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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