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정치적 혐오감이 주는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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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정치적 혐오감이 주는 쾌감
  • 김선주
  • 승인 2023.10.1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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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텔아비브 공항을 막 떠났을 때 하마스의 로켓포 5천 발이 내 뒤꿈치에 쏟아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천만다행이다, 는 안도의 한숨보다 인간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밀려왔다. 집에 돌아와 어제까지 꼬박 사흘을 고열과 구토에 시달렸다.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난 원인을 안다. 어떤 현상이나 사태에 극심한 혐오감을 갖거나 스트레스에 이를 때 내 몸이 이 세계에 보이는 반응이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처음 읽었을 때 그 소설의 내용이 내 몸에 그대로 나타났던 이후로, 반복되는 정신(영적?) 현상이다.

추석 연휴 열흘 동안 나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있었다. 여정의 마지막 날엔 통곡의 벽에 있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에 홍수처럼 쏟아진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는 차가운 돌에 이마를 대고 기도했다. 아니 그건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질문이고 항의였다. 수천 년 동안 당신이 역사하신 이 땅에 왜 아직도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겁니까, 아직도 왜 하느님의 이름으로 혐오하고 학살하는 일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겁니까,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겁니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을 제대로 몰라서 그런 겁니까, 나의 기도는 돌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오랜 시간 통곡의 벽에 붙들려 있는 나의 뒷모습을 누군가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줬다. 당신의 모습이 너무 진실하고 간절해 보였다며.

 

텔아비브 공항의 면세점 책방에 랍비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의 책이 눈에 잘 뜨이는 부스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인 사회가 제일 내세우고 싶어 하는 현대 유대인 지성 중 하나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신들이 내세우는 랍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돌이켜 생각한다. 우리 교인들은 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내 설교가 교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하느님의 공의와 정의를 따르고 있는가? 입만 열면 말씀을 외치고, 입만 열면 십자가를 말하고, 입만 열면 사랑이니 은혜니 떠드는 우리 안에 공의와 평등과 평화가 있는가?

나의 구토는 이런 질문으로부터 온다. 실존을 자각한 사르트르의 신체적 반응을 넘어 시대와 인간의 야만적 본성에 촉수가 닿을 때 나의 구토는 시작된다. 오늘 아침에 겨우 밥 한 술 입에 넘기고 글을 쓴다. 황폐한 몰골과 초췌한 영혼으로, 인간에 대해 쓴다. 그리고 거리에서 사진을 찍어준 열여덟 살 어린 병사들의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메일 창을 연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메인다. 얘들은 전선으로 갔을까? 그러다가 나는 다시 웨스트뱅크로 들어갈 때 마주쳤던 높은 장벽을 기억한다. ‘아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라고 로켓포 5천 발을 쏟아낼 만큼 분개하던 마음이 다시 타오른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전문가적 지식을 가지고 나와 장황하게 설명하려 한다.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상황, 지정학적 문제 어쩌구저쩌구 아는 척들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정학적 문제도 아니고 종교적 문제도 아니다. 단순하다. 인간의 문제다. 인간 안에 못된 놈이 있어서 그렇다.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인간에 대한 환원론에 빠진다. 아니,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환원론적 관점, 그것이 바로 죄성(罪性)이다.

한계와 모순 안에 있는 존재, 그래서 늘 부딪치고 상처내고 스스로 죽어가는 짐승 같은 존재, 그게 인간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다. 구원의 불가능성을 넘어 구원의 영역으로 비상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신앙이다. 그래서 모든 신앙은 겸손으로부터 시작되고 겸손으로 완성된다. 무지하고 무능하며 벌레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절대자 앞에 무릎 꿇음으로써 타자와 세계 앞에 자기 주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겸손이다. 그 겸손의 절정에 십자가가 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다.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로 시인함으로써 일체의 폭력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와 그리스도가 종교가 될 때, 우리는 분리장벽이 되고 5천 발의 로켓포가 된다. 선한 양심과 숭고한 신앙이 없는 종교는 마약과 같아서 스스로 자기 몸을 찢고 할퀴며 쾌감을 느낀다. 정치가 종교적 신념을 가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종교와 정치적 혐오감은 스스로를 죽여가는 쾌감이다.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본질이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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