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암미,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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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암미,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 아닌가?
  • 최태선
  • 승인 2023.10.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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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fineartamerica.com
사진출처=fineartamerica.com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점점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전쟁윤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비난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마스의 무책임한 도발에 대해 지적을 하기도 한다. 평화와 인도주의를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무엇이 평화이고 인도주의인지 사실상 사람들의 이해가 저마다 다르다. 각자의 편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지만 굥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그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친미주의자이니 이스라엘의 편에서 사고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아마도 그의 생각은 더 단호할 것이다. 가자지구의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의 평화 이해는 철저하게 무력을 통한 우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평화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여기저기서 평화에 대한 주장들이 실리고 있기도 하다. 평화에 대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평화를 이루는 일은 누구에게도 난감할 뿐이다. 세상이 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평화는 이미 불가능하기에 세상에서의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 기껏 가능한 것은 힘의 균형추를 맞추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평화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인한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새삼 성서의 "새 사람"이라는 표현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새 사람으로 정의한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참으로 엄숙한 명령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다시 말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예수에 관해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정말 새 사람이 된다. 새 사람이 되는 과정은 몇 단계가 있다. 가장 먼저는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옛 사람을 과연 벗어버렸는가?

참으로 암울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평생을 그리스도교인으로 살면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목사가 되었지만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로 하느님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씌우는 것뿐이다. 그리곤 그것에 거룩한 욕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합리화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교회의 종탑과 십자가를 보라. 나는 오늘날 교회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거대한 인간의 성일 뿐 하느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건물의 위용이 크면 클수록 성령의 성전인 그리스도인은 위축되어 사라진다.

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는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허망한 욕정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세상과의 결별을 의미하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호교론> 초반에서 유스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방식을 로마 제국의 비그리스도인 거주자들의 그것에 맞서는 일종의 반문화적인 아비투스로 제시한다. 유스티누스는 로마인들의 삶을 다른 네 개의 주된 분야에서 나타나는 중독성 관습이라는 특징을 지닌 '비자유(unfreedom)의 아비투스'로 여긴다. 간음에 의해 훼손된 성적 윤리, 마술의 덫에 걸린 사교, 경쟁적인 물욕에 의해 왜곡된 부와 소유, 다른 관습에 대한 증오와 다른 종족에 대한 살해로 가득 찬 폭력과 혐오, 유스티아누스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런 중요한 분야들에서 분투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 모두가 유혹적이며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열심히 그런 버릇을 버리려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그것들이, 유스티아누스가 보기에는 마귀의 능력과 조작에 대한 표현들이기 때문이었다.”(<인내의 발효>, p.241-242)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옛 사람을 벗어버린다는 것이 단순히 추상적인 말장난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삶의 방식의 변화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삶은 달라졌다. 완전히 달라졌다.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고 “일종의 반문화적인 아비투스”, 곧 대안적인 삶을 살게 된다. 새 사람이란 단순히 하느님의 의가 전가되어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스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아비투스 곧 새로운 정상 상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낡은 아비투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설득당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낡은 아비투스를 포기하고 그 네 개의 분야 각각에서 대안적이고 생명을 제공하는 아비투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대안적 아비투스는 성적 절제, 마술이 아닌 하느님을 향한 헌신, 부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공동의 기금 안에 넣고 곤경에 처한 모든 이들과 나누는 것' 폭력과 혐오가 아니라 '우리의 적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을 설득하려 노력하는 것' 등이었다. 유스티누스는 이 새로운 아비투스가 '그분의 말씀이 곧 능력이었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같은 책, p.242)

우리는 묘사된 초기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평화가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진정한 평화란 우리의 적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을 설득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은 부당하게 자신들을 미워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수들을 설득한다. 그 설득하는 방식이 산상수훈에 묘사되어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말은 율법을 말한다. 소위 말하는 탈리오 법칙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절제된 복수인지를 알지 못한다. 창세기의 라멕의 기사에서 보듯이 인간의 복수는 1대1이 아니라 1대70이 되었다. 그것은 곧 무한정한 폭력의 증폭을 의미한다. 손가락을 베이게 만들었다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무한정한 복수가 아니라 1대1의 복수만이 허락된다는 엄격한 제한이 주어졌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라엘은 율법을 완전히 망각했다. 그들이 로암미(Loammi, 내 백성이 아니다)가 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선민행세를 하며 하느님을 모욕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보다 한층 더 강화된 윤리가 주어졌다. 그것이 바로 위의 내용이며 위 내용이 바로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평화를 도모하는 평화의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내는 평화만이 진정한 평화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명심해야 한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나라가 평화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이다. 새 사람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새 사람인지, 평화의 사람인지를 돌아보자. 그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느님을 모욕하는 로 암미일 뿐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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