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다니는 현수막, 박영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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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다니는 현수막, 박영인 선생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10.0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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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데는 순종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순종 없이는 모든 깨달음이 공허할 뿐입니다. 깨달음을 행하기 시작하면 더 많은 깨달음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일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미 깨달은 것마저 잃을 것입니다. 유대의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동보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가지 많고 뿌리 얕은 나무와 같아서 바람이 불면 뿌리가 뽑혀 쓰러지고 만다.”

독일 뮌헨의 바이올린 제작자 마틴 슐레스케는 <가문비나무의 노래>(니케북스, 201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처럼 제 삶의 연주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충만한 삶은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사랑조차도 사랑을 하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삶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문득 어느 길목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을 수 있지만, 그 자비를 내 몸으로 행하지 않으면 그 깨달음도 이내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비행이 내 생각을 이끌어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는 만큼 행할 때, 행한 만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내 관념이 아니라 내 몸이 나를 구원합니다.

신앙고백은 몸으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는 부녀자들에게나 어울릴 것”이라며 교회를 경멸하였던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에게 하느님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되돌려주었던 사람들은 모로코에서 만난 무슬림이었습니다. 신에 대한 장엄한 복종을 그들에게서 보았던 것입니다. 파리로 되돌아간 푸코가 생오쉬스탱 성당에서 위블랭 신부를 만났을 때, 위블랭 신부가 푸코에게 요구한 것은 토론이 아니라 복종이었습니다. 무작정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보라’는 것입니다. 위블랭 신부는 “오만한 자는 바닥으로!”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푸코를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따지는 끝없는 논쟁에서 구하고, 그에게 “세상의 가장자리로 가라!”고 말합니다. 1888년, 그때 푸코의 나이 28세 되던 해였습니다.

마침내 푸코가 찾아간 곳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는 첫날부터 빗자루를 들고 긴 복도를 청소했습니다. 익숙한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단순한 일을 통해 그분에게로 찬찬히 걸어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1901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푸코가 마침내 정착한 곳은 사하라 사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푸코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한 조각의 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동을 필요로 하는지 절실히 깨닫고 체험했다”고 합니다.

“나자렛에 숨어살던 은닉된 예수님의 삶”에 대한 갈망은 “침묵으로 이 세상의 성화를 위해 노력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복음을 입으로 선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삶으로 전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수도생활조차 “선물과 애긍 희사와 연금으로 숨어 사는 가난이 아니라, 소박하고 비천한 노동으로 가난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도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사랑하지만, 그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산으로 주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자!”

 

걸어다니는 또는 굴러다니는 복음

온전한 신앙을 살았던 샤를 드 푸코를 떠올릴 때마다 내 신앙이 참 얄팍하다고 느껴집니다. 랍비 힐렐의 지적처럼 내 삶이 “행동보다 지혜”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마다 ‘경이로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깊은 맛이 없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신앙을 벗어나라고 다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남옥 선생님과 박영인 선생님입니다.

‘걸어다니는 현수막’이신 안남옥 크리스티나 선생님은 ‘탈석탄’, ‘생명 파수꾼’, ‘가톨릭기후행동’을 비롯해 당신이 세상에 대고 전하고 싶은 복음적 메시지를 천에 적어서 언제나 어디서나 몸에 두르고 다니십니다. 세상의 어느 한구석 아픔과 탄식이 배어 나오는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 하시는데 지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 40,31)는 이사야의 예언은 이 분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

 

박영인 루치아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지금도 전동휠체어에 몸을 싣고 다니시는데, 2022년 5월 7일 출범한 ‘멸종반란 가톨릭’의 회원으로 열렬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멸종저항’ 또는 ‘멸종반란’(Extinction Rebellion)은 기후위기로 인간을 포함한 생물종이 멸종하는 사태에 저항하려고 2019년에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환경 단체입니다. 이를 두고 의정부교구의 원동일 신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책으로 배우는 것과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마찬가지로 기후 문제에 대한 신앙적 가르침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로 인한 고민들을 직접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멸종반란 공동체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위계질서가 없는 자율분권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기후위기를 환경 의제를 넘어선 자본주의 성장 체제의 문제로 보고, 이에 맞선 비폭력, 시민불복종, 직접행동을 지향하며, 돌봄과 리젠(regeneration) 문화를 실현하는 생명 공동체입니다.”(<가톨릭신문 2022.5.15. 기사 참고)

박영인 선생님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굴러다니는 현수막’입니다. 휠체어 앞뒤로 현수막을 직접 만들어 달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길거리를 지나가시면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생명평화를 향한 복음적 확신이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잔다르크’ 또는 ‘전사’라고 별명을 붙여도 그저 방긋 웃어 보이는 박영인 선생님은 안남옥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해맑은 미소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워도 추워도 상관없습니다. 당신 한 몸이 필요한 곳이라면 고척동 집에서 명동으로, 광화문으로, 어디라도 전철이 닿는 곳이면 굴러갑니다.

고달픈 길일수록 신앙의 기쁨으로 응대하는 박영인 선생님은 전철에서 묵상하며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눈빛입니다. 그분의 글을 잠시 옮겨봅니다.

“전철 차창에 한강이 들어온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강물이 내 안에
머물러 출렁인다
강물을 두드리는 빗줄기에
황토빛 한강은 요동치며 물보라를 튕겨내고
강 가운데 동그마니 떠 있는 섬의
파란 가지들이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었다
머잖아 후쿠시마 방사능폐기물이 이 비에 섞여 내리는 날
그날도 이 비를 맞을 수 있을까?
비에 가슴을 녹이는 그림이 떠오를까?”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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