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형 인간 때문에, 장기려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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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형 인간 때문에, 장기려 평전
  • 김광남
  • 승인 2023.10.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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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좋은 책이 나왔다고 생각했으나 당장 구매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몇 권 있고 연말까지 읽어야 할 도서목록이 이미 꽉 차 있는 상황에서 책값 48,000원에 분량이 770쪽에 이르는, 게다가 평소에 크게 관심을 둔 적도 없었던 인물의 평전을 굳이 사서 읽어야 할 급박한 이유가 없어서였다.

한데 오늘 교회에 갔더니 이 책이 '이달의 권장도서'로 선정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책이 워낙 두툼해서 구매자가 많지 않을 거라고 예상해서였는지, 교회에서는 이 책이 6권 한정판(?)이고 출판사 할인 10퍼센트에 교회 지원금 1만원을 더해 3만원대에서 판매한다고 광고했다. 그래도 살까 말까 했는데, 예배 마치고 예배실을 나서던 아내가 매대로 가더니 서슴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이건 천기누설에 해당하는데, 아내는 책을 읽지 않는다. 여태 아내가 교회에서 구매한 책은 모두 내가 읽었다. 언젠가 아내에게 "읽지도 않는 책을 왜 사는 거야?" 하고 불퉁거렸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었다. "일단 사두면 언젠가는 읽을 거 아냐. 그리고, 평생 책 만들며 살아온 인간이 그게 할 소리냐?" 젠장.

평전의 저자 지강유철님은 나의 페친 중 한 분인데 글이 정갈하고 힘차서 늘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책의 글은 페북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매끄럽다. 책의 내용은 신선하고 감동적이다. 전체는 나중에 읽더라도 구매한 김에 맛이라도 보려고 프롤로그를 읽었다. 그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장기려는 복음병원을 시작하면서 직책이나 나이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월급을 지급하여 복지 분야에서도 시대를 앞서 나갔다. 그 결과로 병원장과 식구 수가 같은 앰뷸런스 운전기사가 월급이 같았고, 식구가 열 명이던 친구 의사 전종휘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다. 장기려는 1950년대 초부터 성서에서 배운 복음의 정신과 평양에서 출석했던 산정현교회 목회자들이 경험한 동일 임금 지급 방식을 재연했다.

장기려의 개척정신은 대한민국 정부보다 12년이나 앞서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민간의료보험을 실시한 사실에서도 빛이 났다. 보사부 장관이 영세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 포기를 선언했음에도 장기려는 끝내 23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 조합으로 키워냈다. 장기려는 21년 동안 축적한 민간의료보험의 데이터와 노하우를 정부에 인계했다. 정부는 청십자의 사례와 자료, 특히 의료수가 체계를 정책에 많이 반영했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지강유철, <장기려 평전> 19-20쪽)

일단 내지르고 보는 행동형 인간인 아내 덕에 좋은 책을 얻은 듯하다.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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