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대한 영적 싸움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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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영적 싸움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른다
  • 최태선
  • 승인 2023.10.0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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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북한이 사치품을 ‘부르주아 사상문화’ 또는 ‘반사회주의적 행태’라며 단속하고 있지만 김정은을 비롯한 최고위층은 명품 사랑을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해 12월 “청소년들 속에 썩어빠진 부르주아 사상문화를 침투시키려는 적들의 책동을 혁명적인 사상문화로 압도해야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매일경제 기사에서 인용)

기사의 내용대로다. 김정은은 최고급 승용차와 시계는 물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세계 최고다. 그의 딸이 입은 옷도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옷이며, 동생인 김여정이 이번 러시아 방문 때 들고 있는 가방 역시 천만 원이 넘는 명품이다. 얼마 전에는 북한 외무상이 들고 있던 가방 역시 천만 원이 넘는 명품이었다.

위 기사와 김정은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의 행태를 생각해보라. 기사에서는 그것을 ‘이상한 세계의 명품 사랑’이라고 꼬집었다. 또 그것을 ‘아이러니’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아이러니이고 이상한 일일까.

나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도 북한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중국이다. 중국의 상류계층 사람들은 농민공이라 불리는 중국 노동자들이 먹는 점심 식비의 수백만 배나 하는 식사를 한다. 우리의 경우도 수십만 원 혹은 그 이상 하는 식사가 있긴 하지만 그래봐야 수십 배다.

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국민은 빈부격차를 그저 줄여야 할 목표로 생각할 뿐 그것의 의미를 자유라는 명목 하에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뛴 것은 이러한 국민 이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옥을 짓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자기 집값이 오르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맞는다면 집 없는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하거나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값이 오른 집을 팔아 사도(사도를 상징하는 사람)들의 발 아래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기껏해야 죽은 후 자신의 재산을 장학금이나 어린이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는데 사용하거나 매우 드물지만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교회에 위탁하는 경우가 있다.(가톨릭의 경우)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것은 죽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인간본능일 뿐이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나는 수많은 목사 친구들과, 사귀었던 신부들 가운데 이 기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목사나 신부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교회의 교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기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이것이 역사 속에 선포된 하느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보는 이들은 없다. 이것이 얼마나 엄숙한 선언인가를 느끼는 이들도 없다. 이것은 단순한 상황의 묘사가 아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회가 존재한 적은 없었다. 체제가 공산주의건 민주주의건 마찬가지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치품을 썩어빠진 부르주아 사상문화라고 비판하는 공산주의 사회 역시 지도자들이 앞장 서 명품을 선호한다.

권력의 주체가 국민이라고 주장하는 우리 사회나 인민을 앞장세우는 북한은 물론 선진국 사회 역시 가난한 사람들을 수없이 많다. 우리보다 잘 사는 미국이나 잘 살았던 일본에 노숙자들이 우리보다 많다. 미국의 경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노숙자 수가 우리나라 전체 노숙자들보다 많다. 천사의 도시라는 의미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그 도시가 노숙자들 천지가 된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인류 역사에 없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회를 이루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런 역사를 유산으로 물려받지 못했다. 퇴행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이런 사회를 역행하는 교회들이 되고 말았다. 나는 교인들 간의 빈부격차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를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고자 노력하고, 공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다양한 은사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존중하려는 교회도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회를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 교회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우리 시대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교회를 세우고자 목표를 세우고 오늘까지 달려왔지만 내 재산만 사라졌을 뿐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 교회가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교회는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라진 것은 복음이며 예수의 제자들의 사회인 교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시대에 이 사라진 복음을 되찾고, 예수의 제자들의 사회인 교회가 말뿐인 허울이 아니라 실재임을 보여주는 교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내 삶을 포함한 우리의 삶으로 증언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내 마음에 이런 염원을 심어주신 분이 성령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내 재산을 모두 잃게 한 내 결정을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인정해주신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진지하고 엄숙하다. 어찌 그럴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는 면면히 이어지는 이런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은 역사의 퇴행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이다. 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도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힘이 미증유의 거대한 맘몬을 형성한 우리 시대에 이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하려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무모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믿는 것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제 작은 아이가 결혼으로 우리 집을 떠났다. 나는 이제 긴장을 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본다. 디아스포라가 되어 어디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려는 일은 거대한 맘몬과 싸우는 일이다. 이 거대한 영적 싸움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른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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