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신학자의 등장_몰트만, 죌레, 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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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자의 등장_몰트만, 죌레, 메츠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9.25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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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강독-9
위르겐 몰트만
위르겐 몰트만

몰트만: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

정치신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울부짖을 때, 이 지옥 속에서 하느님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통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그 처참함을 끝까지 체험하셨다는 고백이다. 여기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받은 고통은 곧 강생한 하느님의 고통이라는 게 몰트만의 생각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과 함께 실제로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버리는 아버지와 버림받은 아들이 성령 안에서 고통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셨듯이, 이분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생명이 온다는 희망이 주어진다. 이를 존슨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잔인하게 살해된 사람들이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은 이 슬픔을 영원한 기쁨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이런 희망 덕분에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의지는 불타오른다”고 했다.

 

도로테 죌레

죌레: 침묵의 외침

도로테 죌레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에 도전한다. 하느님의 중요한 자질은 ‘힘’이며, 주요임무는 ‘지배’이고, 하느님은 인간의 독립을 가장 두려워하며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는 관점을 버린다. 그는 오히려 하느님은 전능한 지배자가 아니라 ‘사심 없는 사랑’의 존재라고 강조한다. 강조점의 이동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무력하게 죽게 하셨다. 예수님은 군대도 없이, 그를 구원하는 어떤 마술도 없이 비폭력적인 방식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느님의 힘이란 폭력적 힘이 아니라, “아스팔트의 틈을 뚫고 솟아오르는 풀” 같은 생명의 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은 고통 한가운데서 들리는 생명의 조용한 외침이다. 죌레는 우리가 오로지 하느님의 일부가 될 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오로지 타인에게 가해진 모든 종류의 부당한 고통에 저항할 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요하네스 메츠
요한 밥티스트 메츠

메츠: 하느님을 향한 연민

메츠는 ‘고통받하는 하느님’이라는 상징이 고통을 비밀스럽게 미화시킬 위험성을 경고한다. 고통스런 상황을 합리화하고 전통신학에서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식의 함정에 빠져서 희생자들의 외침에서 드러나는 긴장을 흩어버릴 수 있다고 염려한다. 메츠는 오히려 ‘기억’과 ‘애도’를 통한 저항을 강조한다.

1. 기억하기

“나를 기억하여 행하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핵심은 예수님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은 역사에서 부당하게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운다. 이것은 ‘위험한 기억’인데, 압제자들은 그 기억을 묻어버리려고 하지만, 우리는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되살려냄으로써 승리를 빼앗아 올 수 있다.

세월호 유족들이 “이 아이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세월호 참사 당일의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호소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억울한 죽음과 짓밟힌 이들에 대한 기억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물리면서 “선한 시간이 오면 그들 역시 다시 평가된다는 희망”의 근거이다. 지금 남을 해치고 죽이는 자들의 승리가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한 기억은 모든 연민을 다림질해버리는 숨 막히는 따분함에 도전한다. 이런 진부한 삶에 도전하는 위험한 기억은 불의에 저항하는 행동을 통해 신자들을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며,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경계한다.

2. 슬퍼하기

지금은 아무도 미사 시간에 슬퍼하거나 울부짖지 않고 깔끔하게 기도하지만, 고통받는 이들이 경험한 슬픔과 탄원은 시편과 예언서, 복음서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 메츠는 <욥기>를 최고의 가이드로 삼는다. 욥은 사업에 망하고 병들어 있는 가운데 세 친구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은 입을 모아 그의 고통이 죄 때문이라며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하느님께 항변한다.

무고한 고통에 대하여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슬픔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 일어남에 대한 고발이며, “하느님께 닿는 고통”의 울부짖음이다. 결국 이러한 슬픔이 하느님의 응답이 있으리라는 고뇌에 찬 희망을 낳는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 가운데 부르짖고 저항하며 슬퍼하고 분노를 외치며 이런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

여전히 세계는 잘 부서지고 죄에 가득 차 있으며,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여기에 논리적인 해답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유처럼 “사랑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정치신학은 공공영역에서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롭고 친절하게 살 수 있으며, 공동선을 위해 아름다운 식탁을 차릴 수 있다고 믿는다. 고난에 찬 상황에서도 이런 행동은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 가운데도 계시며, 그 고통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행동 속에도 계신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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