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과연 신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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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과연 신성한가?
  • 최태선
  • 승인 2023.09.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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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오래 전 텃밭농사를 지은 적이 있다. 매우 힘이 드는 일이지만, 더구나 들이는 노동에 비해 나오는 것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나는 그 일이 좋았다. 그래서 지금도 옥상에 흙을 담아놓은 통과 화분에 작물을 심어 기르고 있다. 특히 영성수련을 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Ora et labora."

기도하고 일하라는 것이다. 노동이 곧 기도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경도되어 오랫동안 노동을 신성시했다. 그리고 노동을 정말 기도라고 생각했다. 신자들은 거기에 성서를 인용하기도 한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이 말을 인용하는 경우가 어떤 때인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할 때이다. 그리고 애초에 바오로 사도가 이 말을 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도 생각해보라. 그것은 철저히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개인주의가 자리할 곳은 없다.

나는 이제까지 노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정말 노동은 신성한 것인가? 처음부터 생각을 해보자.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내리신 벌이었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 아담은 수고하지 않고도 각종 실과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 벌을 받아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해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노동은 타락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노동은 정말 기도이고 신성한 것인가. 일 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과연 죽어야 할(먹지도 말아야 할) 이유인가.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과학과 기술이 첨단을 달리는 현대에도 사실은 신화가 가득하다. 자끄 엘륄은 현대사회를 감싸고 있는 이러한 신화들을 분석하면서 현대 사회의 수많은 신화들이 역사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 신화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혀낸다. 그는 이 두 가지 신화 위에 노동, 행복, 국가, 젊음, 영웅, 생산성 등등의 신화가 연달아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들 대부분이 끊임없이 돈을 버는 행위와 제한이 없는 탐욕을 정당화하고 있다.

행복에 대한 신화를 살펴보자. 고대로부터 행복은 삶의 목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어느새 행복을 물질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아를 가장 끔찍한 불행으로, 배부른 것이야말로 사람됨의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 말하게 되었다. 배가 불러야 인간이 되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한결같이 소비를 통해서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광고의 주인공들처럼 행복해지는 것이 사는 이유이고 사람됨의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허위의식이 탐욕의 추구를 정당화하고, 인간은 행복해지려는 끝도 없는 돈 벌기 게임에 몰입하게 되었다.

결국 행복의 신화는 현대인들을 직장으로 몰아넣는다. 직장에 가서 돈을 버는 행위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 돈을 버는 행위는 노동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노동의 신화란 노동이 진리와 정의, 형제애, 그리고 건강이라는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노동은 부도덕과 빈곤을 제거하며 인간다움을 이뤄낸다는 주장을 한다.

교회는 노동의 신화에 동조하여 태초에 아담이 노동의 소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수도원운동은 "노동은 곧 기도"라는 표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칼 마르크스는 노동을 가치창조의 근원이라고 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을 프롤레타리아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심지어 나치는 노동을 내적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노동은 가장 신성한 인간의 의무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의 신화는 18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자기 정당화 논리다. 그들은 출신과 가문이 절대적인 시대에 실력과 노력으로 승부를 겨뤘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들을 이기고 그들이 승리했다. 노동은 부르주아들이 역사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무기였다.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노동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교회가 노동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교회의 노동에 대한 기본 입장은 타락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오직 중세 수도원은 노동을 의무라고 했다. 그러나 노동 자체를 고귀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이 금식이나 기도와 같이 인간을 겸손하게 하는 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주아의 주장을 받아들여 노동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라는 말씀을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대로 ‘문화 명령’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노동을 미완성의 창조를 완성하는 거룩한 사명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맘몬은 탐욕의 추구를 하느님의 명령으로 위장한 것이다!

그 결과 이윤의 극대화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그 동기가 되는 탐욕을 선으로 추앙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세의 징조다.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느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사람들은 거짓 이론과 신화에 빠져 너무도 분명한 이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현상이 당연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마치 진리인 것처럼 여기고, 그것이 마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탐욕을 선으로 추앙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예수님의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묵상하라. 노동은 절대적이지 않다. 신성하지도 않다. 노동은 공동체적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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