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쉽다, 아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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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쉽다, 아니 어렵다
  • 최태선
  • 승인 2023.09.1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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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by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일전에 내가 쓴 글에 대해 불쾌함을 표현한 분이 있었다. 내가 쓴 ‘가톨릭이라는 우물’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게도 분명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우물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게 그것을 지적하면 나는 그것을 부인하면서 그런 지적을 한 상대방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일차적인 반응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것을 반추하고 그 지적이 옳다면 거기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 지적을 해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도 가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자기 확신에 차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우주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우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일이 참 어렵다. 얼마 전 길희성님이 타계하셨다. 그분도 내 지평을 넓혀준 분 가운데 한 분이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길을 가지는 않는다. 다만 배울 것이 있는 분으로서 내 사고의 폭을 넓혀준 분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카인의 후예(선악을 가릴 줄 안하도 믿고 있는 하나의 우주로서)’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그런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 정도 카인의 후예로부터 벗어났지만 나 자신의 실천력에 대해 과도한 믿음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으로 인해 우리의 생각의 길에 ‘신포도’가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반성하고 겸손해지거나 용기를 내어 실천에 뛰어들기보다는 우회로를 생각해낸다. 나는 이것을 자기 합리화로 이해하는데 인간의 이런 합리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은 가히 전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단순히 확정편향이나 편향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은 신앙의 과정이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편견이나 편향성을 자신보다 더 잘 발견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그것을 지적해줄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필요하다. 그런데 위에서 내가 썼던 것처럼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분노와 불쾌함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사람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멘토를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멘토의 한계는 인간의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어느 순간 인간은 멘토를 버린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다행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재단할 수 있다. 자기 식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그런 글 하나를 보았다.

"사실,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해야 하고, 밥 먹을 때마다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려야 하고, 아침 저녁 기도를 해야 하고, 성사생활을 해야 하고, 십계명을 지켜야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기에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 쉽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생색내지 않고 물 한 잔, 밥 한 그릇 나누면 됩니다.

참 쉽습니다."

이분은 노숙자 선생님들을 VIP로 섬기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다. 이분은 자신이 하는 일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한 성서이해를 표현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분의 이해가 바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였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가난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그 가난한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자신들의 사명을 회피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가난한 동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정결규례를 지키지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상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예수님 보시기에 어땠을까?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의 허위의식을 꿰뚫어보셨다, 그것이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한 질타에 드러나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예수님은 그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회 칠한 무덤’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늘날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구원이 무 건너갔다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위 글을 쓰신 분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하지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성사생활도 못하고, 계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어 구원 받기가 어려울까? 어불성설이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두 말 하지 않고 구원하신다. 그 내용이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 나와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부자는 종교적인 규례를 잘지키는 사람이었다. 거지가 자기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을 수 있게 하였다는 사실 하나로도 그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는 지옥엘 갔다. 그가 지은 죄는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그런 규례들을 지킬 수 없었다. 하지만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천국행의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노숙자들이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기 어려워 구원이 어려울까?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이며 자기 식의 성서 이해이다. 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자들이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생색내지 않고 물 한 잔 밥 한 그릇을 대접했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유산을 교회나 수도원에 바치면 되는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일과 그에 따른 신학 이해라는 함정에 빠진 모습이다.

구원은 쉽고 어려움이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에서 쉽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정의를 위해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사고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깨달은 바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머뭇거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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