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대통령, 나까무라 똘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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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대통령, 나까무라 똘마니
  • 김선주
  • 승인 2023.09.1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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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허영심 강하고 위선적인 임금님이 사기꾼들에게 속아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얘기다. 원제목은 ‘황제의 새로운 옷(The Emperor’s New Clothes)인데 일본의 출판물을 따라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허영심이 많은 임금님에게 두 재단사가 나타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주겠다며 멍청이에게는 이 옷감이 보이질 않는다고 말한다. 임금님은 자신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로 거리를 활보한다.

이 얘기는 자신의 무지와 거짓을 은폐하려는 권력자의 행태를 조롱하는 풍자 콩트다. 그렇다. 이야기는 적당량의 소금처럼 풍자와 해학이 가미될 때 맛이 있다. 더욱이 코미디는 시대와 권력의 부조리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꼬집고 조롱하는 풍자와 해학을 생명으로 한다. 풍자 없는 코미디가 지배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그동안 우리나라 미디어들은 풍자성 없는 슬립스틱 코미디나 패러디 코미디, 심벌즈 코미디류들로 개그 프로그램을 채웠다. 풍자 없는 코미디는 파시즘이 낳은 어두운 그림자다.

 

1990년대 초반, KBS 2TV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머1번지>라는 개그 프로그램에서 최양락과 김학래가 충청도 사투리로 ‘괜찮아유’라는 콩트를 선보였다. 늘어진 빤스 고무줄 같은 충청도 사투리로 ‘괜찮아유~’를 연발하지만, 그것은 고무줄을 길게 잡아 늘였다가 탁 놔버릴 때 아픈 곳을 정통으로 때려버리는 블랙코미디였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에 굶주리며 고통받을 때 김학래의 집안은 아버지 덕분에 잘 살았다는 얘기로 빌드업을 시작한다. 그러면 김학래는 그것을 칭찬으로 알고 자기 가문을 자랑다. 그 때 최양락은 꼬무줄 끝을 탁 놔 버리듯 나까무라의 이름으로 김학래의 아픈 곳을 친다. “경애 할아버지는 나까무라 똘마니로~~” “야, 하지마 임마!”

둘은 술잔을 나누며 금세 화해하며 다시 분위기를 잡아나가지만 최양락의 고무줄 땡기기 빌드업은 또 시작된다. 마음씨 좋은 충청도 아저씨 김학래는 방심하다가 그 고무줄에 또다시 아픈 곳을 맞고 발작한다. 사람들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이 콩트를 지겹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폭소를 자아냈다. 거기에는 시대의 아픔과 모순이 용암처럼 잠복해 있다가 웃음으로 폭발하는 집단 무의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까무라’와의 숨겨진 과거사를 들출 때, 김학래가 최양락의 조롱을 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네 가지다. 첫째는 친일이 정당했다는 논리를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최양락에게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의 주장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가 말을 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는 것이고 넷째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다. 첫째 방법은 뉴라이트가 주장했고 둘째는 국민의힘 같은 보수 정치 집단이 해왔다. 그리고 셋째 방법은 보수언론이 해왔던 역할이다.

최양락과 김학래 사이에서 벌어지는 나까무라 콩트는 넷째 방법을 거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희극이다. 그래서 우리는 ‘괜찮아유~’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지만 동시에 쓴웃음을 삼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블랙코미디다. 블랙코미디는 진실을 비틀어 말하고 정곡을 찔러 상처 난 곳에 소금을 뿌리듯 부조리한 인간을 발작하게 만든다. 그 발작을 보면서 관객은 폭소하며 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 이것이 블랙코미디의 힘이다.

요즘 돌아가는 정국을 보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이 대로를 활보하며 자유민주주의, 공산전체주의를 외치는 형국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덮기 위해 큰 소리로 떠들수록 그의 벌거벗은 몸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비극은 희극으로 바뀐다. 사람들은 분노와 함께 그를 조롱하는 갖가지 콘텐츠를 만들어 작금의 정국을 풍자하는 데 쾌감을 느끼고 있다. 노래와 만평, 패러디 같은 문화적 콘텐츠가 SNS를 통해 유속이 빠른 강물처럼 흘러 다니고 있다.

우리나라 방송에서 코미디 프로가 사라진 것은 코미디 같은 현실의 희극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조롱 섞어 말한다. 맞다, 식상한 슬랩스틱(몸 개그) 같은 것으로 교양 있는 시민사회의 위트와 풍자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코미디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실이 코미디보다 더 코미디 같은데 그 코미디를 능가하지 못하니 개그 프로그램은 죽은 것이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유머1번지고 개그콘서트다. 유머1번지 거리에 활보하고 있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며 키득거리는 것으로 사람들은 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개그콘서트의 무대 위에 발가벗은 총리, 발가벗은 장관들이 연출하는 나체쇼를 보는 것으로 나는 오늘을 즐긴다.

분노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은 상황과 대상을 희극화시키는 것이다. 너무 엄숙하게만 생각하지 말라. 인간의 역사는 비극적이지만 그 영원한 비극은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희극적이기도 한다. 그 희극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우울감에 젖을 수밖에 없다. 위트와 해학, 풍자는 비극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웃자.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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