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섬에 갇혀 살 것인가, 신묘한 바다로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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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섬에 갇혀 살 것인가, 신묘한 바다로 나갈 것인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9.0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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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강독-6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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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당신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언제든지 제공하신다. “하느님을 하느님이게 하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그분은 그가 가톨릭신자라서, 게다가 성직자라서, 또는 수도자라서 더 듬뿍 은총을 내어주시지 않는다.

더 이상 사람들이 관습이나 일반적 합의에 따라 신자가 되지 않는 세속화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가를 경험한 신비주의자가 되든가, 어떤 것도 멈춘 그(그녀)가 될 것”이라고 칼 라너는 주장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준 사랑의 행위 안에서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자리잡은 신비에 자신을 맡기고 것이다. 종교에 대한 어떤 명백한 언급이 없어도, 용감하고 열정적이며 책임감 있는 삶이 있는 곳마다 하느님은 존재한다.

교회는 단순히 개인적인 경건함이나 윤리적인 삶을 증진시키는 기구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을 증명하는 신성한 곳이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물이 끊임없이 모두에게 전달됨을 세상에 알리는 모임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은 무조건적인 이웃사랑이라는 책임 있는 행동 속에서 확증된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35.40)

우리는 신묘하고 신성한 신비에 휩싸여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시키며, 그것은 당당한 믿음으로 가득 차 사랑스런 친절을 쏟아붓는다. 라너는 “이웃사랑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의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려진 오늘날, 사랑은 사회영역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감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고 했다.

나뭇잎이 더 이상 경건의 나무에 무성하지 못하는 때는 겨울일 것이다. 하지만 앙상한 나뭇가지들 덕분에 우리는 숲의 더 깊은 곳을 볼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은혜로운 하느님의 신비를 본다. 우리는 하느님을 개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다룰 수 없다. 하느님은 간구하는 존재인 우리들의 ‘어딘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에 의하면, 우리는 작은 섬과 신묘한 바다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약삭빠름이 거주하는 작은 오두막에서 질식할 것인지, 아니면 지식과 행위의 문을 열고 하느님을 향한 전인미답의 탐험으로 나아가 세상에서 보살피는 사랑을 실천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또다른 연안(沿岸)으로 가고 있다.(황지우)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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