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상황이어서 사랑하게 된 여인, 예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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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상황이어서 사랑하게 된 여인, 예수, 교회?
  • 김광남
  • 승인 2023.08.2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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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루드비크는 그가 가장 비참했던 시절에 만난, 너무나 사랑했던, 그러나 한 차례의 다툼 후 헤어진 여인 루치에를 잊지 못한다. 여러 해가 흐른 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음 속으로 내가 그토록 루치에를 사랑했어도, 그녀가 그렇게 완벽하게 유일한 존재였어도, 그녀는 우리가 서로 알게 되고 매혹되었던 '그때의 상황'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사귀어 간 모든 상황에서 그 여인을 떼어 놓으려고 하는 것, 집요한 정신 집중으로 그녀에게서 그녀 자체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 내려고, 그러니까 사랑에 형태를 부여하는, 그녀와 함께 겪은 그 사연을 다 없애 버리려고 애쓰는 것은 어떤 추론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밀란 쿤데라, <농담> 중에서)

여인에 대한 사랑만 그럴까? 예수에 대한,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함께 겪었던 '그때의 상황'이 없었어도 예수와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가능했을까?

우리의 상황과 별개인 예수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 가능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을 도외시한 채 '집요한 정신 집중을 통해' 예수와 교회에 대한 순전한 사랑을 말하는 건 허황된 일 아닐까?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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