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아무도 없어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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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아무도 없어도 감사하다
  • 최태선
  • 승인 2023.08.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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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오늘 새벽 옥상에 심은 작물에 물을 잔뜩 주었다. 여행으로 집을 비우는 사흘간 잘 버틸지가 걱정이다. 뜨거운 햇빛으로 아침에 물을 주어도 저녁이면 바싹 마르기 때문이다. 사실 별 소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매일 물을 주느라 힘만 든다. 그래도 그곳에 나비들이 날아 와 알을 낳고, 벌들이 날아 와 수정을 시킨다. 때론 말벌까지 나타나 비상사태를 연출하기도 한다. 들이는 수고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는 소출이다. 하지만 생명을 가꾸는 기쁨을 작물들을 길러보지 못한 사람들은 느낄 수 없다.

작물이 시들면 어디가 문제인지 살피고, 벌레가 생기면 벌레도 잡아주고, 물을 주는 것은 물론 양분이 될 수 있는 것을 공급해준다. 전에 이보다 더 많은 농사를 지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생명을 보살핀다는 것의 의미를 이것을 통해 배운다.

이젠 이런 것을 배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허무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언제라도 주님의 호출에 출동할 대기를 하며 살고 있다. 때론 사는 것이 힘들어 하느님께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외롭기 때문이다.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다. 내 인생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참 많이 잘못되고 이미 상당히 실패한 것이다. 이제 내게 하소연할 대상이 주님밖에 없고, 갈 곳은 없다. 그래서 주님께 제발 좀 저를 데려가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이렇게 외로울 때면 전화를 할 사람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나와 연락을 끊었다. 그래도 나를 욕하지 않고 떠나서 다행이긴 하다. 내게서 무언가 결정적인 하자를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와 만났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내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주님이 나를 고립시키셨다고 위안을 하지만 내게 결정적으로 모난 부분이나 특히 내가 말하는 것과 내 삶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새삼 요나의 박 넝쿨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렇다. 인간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에 큰 의미를 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내가 의지할 그 무엇을 치워버린다. 최근에는 내 글이 칼럼으로 실리던 곳에 내 글이 실리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나를 힘들게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이미 극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만 실상 내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삶, 고립된 삶을 살기가 어렵다. 입으로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한다는 찬양을 드려도 실제로는 주님 외에 다른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정말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어야 그것이 드러난다. 특히 가난은 외로움을 절감하게 하는 도구이다. 가난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한다. 하지만 가난하면 외로움을 오롯이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그 외로움이 내 신앙을 시험한다. 그리고 나는 그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한다.

하지만 그것은 감사한 기회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내게 만일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다. 이것도 고립이 주는 은총의 기회이다. 고립은 책임을 물을 사람을 자기 자신 외에는 없게 만든다. 그래서 내가 이기고 내가 견뎌야 한다. 그렇게 내가 외로움을 이겨낼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외롭지 않은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광야의 삶은 그래서 하느님의 학교이다. 전에도 수없이 이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이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의 삶을 지나야 하는 하느님의 학교는 힘들다.

최근 기사에서 보았던 백강현이 생각난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서울과학고를 그만 다니고 싶을 정도로 그 아이는 힘들었다. 힘들 수밖에 없다. 그는 천재다. 천재란 원래 고독한 것이다. 강현이가 이기지 못한 것도 바로 그 고독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정말 안쓰럽다. 천재인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불행인 것이다. 또래 아이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 가면 그는 어린아이이다. 결국 그는 혼자 있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경쟁의 사회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았다. 수행평가를 조별로 할 때 강현이가 들어오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그 조의 학생들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다.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게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조의 아이들이 강현이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한계이다.

나는 그 상황을 바라보고 강현이가 조원이 된 조의 학생들이 강현이를 좀 보살피고 오히려 강현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내는 조가 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그 조의 아이들 가운데 강현이를 사랑하고 강현이를 긍휼히 여겨서 보듬어줄 수 있는 아이가 그렇게 하나도 없을까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동떨어진 생각인지 나는 안다.

내 이런 생각은 하느님 나라의 관점으로 그들의 상황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은 교회 안에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나는 강현이의 외로움을 이해해줄 수 있다. 그는 졌다.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런 그를 도와주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왜 똑같은 복음을 읽고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이 나처럼 가난을 경험하지 못하고 고립의 상황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내가 하느님의 학교라고 말한 광야의 삶을 지나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제 안다. 얼마 전 나를 버리신 분도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도록 내가 쓴 글들을 읽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해왔지만 결국 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서 나는 무력해지고, 작아진다. 물론 세상은 그런 사람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때의 외로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외로울 때 주님은 다가와 친구가 되어주신다. 이제 나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내가 못 견디게 외로울 때 슬며시 주님을 생각한다. 그러면 그분이 이미 내 곁에 와 계신다. 그러나 이것을 한두 번 경험한다고 해서 주님이 친한 친구가 되시지는 않는다. 주님은 반복해서 그런 상황을 지나게 하심으로 아브라함과 같이 이성이 완전히 사라져야 순종할 수 있는 요구를 하시고, 그것을 통해 자기 믿음을 볼 수 있게 해주신다.

정말 어려운 길이 아닐 수 없다. 내 곁에 아무도 없어서 감사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감사한다. 내게서 모든 것을 떠나게 하시는 것도 감사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야 주님은 비로소 내 주님이 되실 수 있다.

내가 못 견딜 때 주님은 얼마나 힘이 드실까. 나는 최근 손자를 통해 그것을 더 생생하게 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녀석이 다치거나 아플 때, 혹은 그 녀석이 슬퍼할 때나 땡깡을 부릴 때 나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손자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주님도 그러하시다.

그래서 나는 힘들고 외롭지만 염려하지 않는다. 나가서 바람을 한 번 쐬면 정신이 돌아온다. 광야에는 불어오는 바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지 못하고 죽어도 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안다.

새 떠난 빈 가지가 홀로
흔들리는 것은
그를 붙잡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바람의 빈 자리가
한 뼘쯤 더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김주수, 빈 가슴)

그렇다. 그 한 뼘쯤 늘어난 자리에 다른 사람이 깃든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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