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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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8.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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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을 맞출 때], 김학철, 비아, 2022

히브리성서만큼 정치적인 문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이 파라오를 신격화시킨 군주제의 산물이며,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그 파라오의 통치아래서 고난받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분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조폭에 버금가는 검찰독재가 대한민국을 덮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이어 시국미사를 봉헌하였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는 마치 유신독재에 저항하던 시절의 언어들을 다시 호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권력과 자본을 중심으로 세련되게, 때론 거칠게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지배층은 하느님처럼 행세합니다. 상위 10퍼센트의 정신세계는 하위 90퍼센트의 인민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섬기는 자가 다스린다”는 원칙은 무력합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야기는 헌법 조항에 불과합니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나도 하느님처럼

“신과 아담은 모두 근육이 잘 잡힌 멋진 남자로 등장한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을 반영하기도 하고, 동시에 성서에서 남자만을 가리켜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본문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김학철은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을 맞출 때>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로마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 <아담의 창조>를 분석하면서 미켈란젤로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산물임을 알려줍니다. 이런 가부장적 한계는 당대 교회의 가부장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인간과 하느님의 친밀한 관계 역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아담은 오른팔과 왼팔을 내밀고 다른 팔은 굽혀서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아담이 ‘하느님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닮은꼴이라는 것이지요. 한편 하느님이 내민 손가락을 향해 아담은 제 손가락을 맞추려고 하는데,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두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창조가 완성되리라 기대합니다.

<아담의 창조>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신학적 메시지를 발견한 의학계의 소견도 있습니다. 미국 의학 학술지에 발표된 메쉬버거(Frank Meshberger)의 글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하느님과 그분이 걸친 망토, 그리고 그 안에 인물이 배치된 모습을 보면 인간 뇌의 단면도의 해부학적 모양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또한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지 않았는데도 아담이 살아 있는 것은 마치 생명의 전극이 시냅스 간극(synaptic cleft)을 통해 전달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오른팔 밑에 슬픈 표정을 한 천사가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슬픔에 잠겨있을 때 PET 스캔에 나타나는 뇌의 영역과 일치한다고 해요. 해부학 지식을 갖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의 형상을 이성과 관련있는 인간의 ‘뇌’로 표현한 셈입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균형감 넘친 <아담의 창조>를 비극적으로 패러디한 화가도 있습니다. 질서있는 창조를 혼돈 속에서 구현한 새뮤얼 박(Samuel Bak, 1933~)의 <전쟁 때의 창조 Ⅲ>입니다. 이 그림에서 아담은 지쳐있는 포로의 모습입니다. 아담의 뒤편과 오른편엔 불발탄이 남아있고, 주변은 온통 쓰레기 더미입니다.

여기서 아담의 모습은 새뮤얼 박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어린시절 유대인수용소에서 지냈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러선지 그림에서 아담은 포로복을 입고 머리가 박박 깎인 채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포탄이 박살된 벽의 빈 공간에 ‘없이 있습니다.’ 사람 형상의 빈 공간이 하느님을 짐작케 할 뿐입니다. 여기서 아담은 ‘없이 있는’ 하느님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손가락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하느님을 찾으려는 인간은 사람다워진다는 뜻일 겁니다.

 

새뮤얼 박, <전쟁 때의 창조 Ⅲ>

전쟁 없는 창조

김학철은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를 되짚어보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사제계 문헌이라는 이 창조이야기는 바빌론 포로기 아니면 포로기 직후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들은 원한과 증오, 좌절과 열패감을 느꼈을 텐데, 그들의 상황은 바빌론의 마르둑 신화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르둑은 어머니 신 티아마트와 전쟁을 치르고 신들의 왕이 됩니다.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시체를 활용해 세상을 창조하고, 동료 신들의 불평을 잠재울 목적으로 원수의 혈육을 취해 인간을 창조해 노역을 시킵니다. 여기서 빌론 통치자 네브카드네자르 2세는 마르둑 신의 지상 대리자로서 ‘마르둑의 형상’입니다. 그러니 마르둑의 행동을 본받아 전쟁으로 정복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노예살이하던 유대인들은 색다른 창조이야기를 지었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전쟁이나 패배자의 시체 없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통치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어느 인간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폭력과 무례는 하느님에 대한 폭력과 무례입니다. 노예들조차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근거를 하느님 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마치 새뮤얼 박이 무너진 감옥 안에서 하느님께 손가락을 내밀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 밖에 신상이 따로 없다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을 맞출 때>에서는, 기원전 63년 유대를 정복한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지성소 안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엇습니다. 다른 종교의 신전에는 신의 형상이 있기 마련이지만 예루살렘 성소는 텅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만들었던 성전에는 야훼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지만, 바빌론 유배 이후에 세워진 제2성전에는 그마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66~70년 사이에 유대 반로마항쟁이 벌어졌을 때 로마군은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렸지만, 유대교를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본래가 ‘집이 없는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신상(神像)도 없는 종교입니다. 신상이 없으니 신전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면서 사실상 유대인들은 본래의 신앙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야훼께서 왕이신데, 왜 인간 왕이 따로 필요한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신과 배반으로 탄생한 다윗왕조는 성전을 야훼 하느님께 지어 바쳤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지성소의 장막을 찢어버림으로써 하느님의 거처를 알렸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소와 양을 도살하여 기름을 태운 냄새가 진동하는 성전을 하느님께서 달가와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다윗왕가가 왕권강화를 위해 하느님을 성전에 유폐시켰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다윗처럼 싸움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힐난하시며 말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 합니다.(요한 2,19-21참조)

하느님을 보고 듣고 맛보고

김학철은 “예수는 하느님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냄새 맡는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직 예루살렘이 웅장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 이미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르신 그대로입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 가운데에서 거닐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2코린 6,1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상을 직접 만들어, 당신이 만든 세상에 살게 하였습니다. 바로 인간이 야훼 하느님의 신상[형상]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은 온 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모든 인간이 신상이라고 선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신상[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동무요 도반이요 동지요 연인으로 삼아 살아가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라면, 그분처럼 자기 삶의 터전을 성전으로 삼아, 하느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겠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군주제를 전복시키는 삶입니다. 이 세상과 교회 안에 잔존하는 권력과 군주제적 유습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탄성을 들을 길이 없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동영상 강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강사: 한상봉 이시도로(가톨릭일꾼 편집장)
일시: 9월 15일~10월 20일까지 5주간 10강
          (매주 금요일 강의 동영상 + 자료 업데이트)
교재: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김학철, 2022
강의 방법: 동영상 강의
-해당일에 동영상 강의를 열어볼 수 있도록 이메일로 동영상 링크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강의록 PPT + PDF + 음성파일을 같은 날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문자로 강의 동영상을 링크해 드리니, 핸드폰에서 바로 시청할 수도 있습니다.

◆ 수강료: 6만원
              (송금계좌) 농협 352-1189-4554-13 한상봉(가톨릭일꾼)
◆ 수강신청(아래 주소 클릭해 신청서 작성)

https://docs.google.com/forms/d/1cUDgeC8B8wcPHI5ulZMbXjGLeedKHQkWJEvtXW3Cf6w/


◆ 강의 일정

09/15 1강: 인간은 하느님의 이미지
           2강: 창조이야기, 미켈란젤로와 새뮤얼 박
09/22 3강: 우리를 구원하는 손
           4강: 소망_머문 별을 보다
10/06 5강: 내칠 수 없는 마음과 정의
            6강: 네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_지거 쾨더
10/13 7강: 에덴을 기억할 수 있다면
            8강: 어떻게 사랑할까_이웃과 형제
10/20 9강: 하느님 이름으로 기만하다
           10강: 길 위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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