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선물같은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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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선물같은 전통
  • 이연학
  • 승인 2023.08.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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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전통
사진출처=stocksy.com
사진출처=stocksy.com

‘전통’은 얘기하기에 딱딱하고 건조한 주제다. 하지만 인생길에서 피해 갈 수 없이 막강한 비중을 지닌 주제다. 그것을 통해 개인은 한 인격으로서의 ‘나’를 형성하고 성숙시키며, 공동체는 그 고유한 정체성을 역사 속에 지속, 성장시킨다.

각 집단 구성원의 정체감과 소속감의 출처가 된다는 점에서 전통은 또한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을 안전하게 감싸기도 하지만 동시에 답답하게 가둔다는 느낌을 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전통과 전통주의

전통이 살아 흐르는 물처럼 움직이기를 그칠 때 ‘전통주의’가 나타난다. 더 심하면 ‘원리주의’(fundamentalism)의 눈먼 폭력과 합체된다. 동일한 전통에 소속된 ‘우리’가 지나치게 강고해지면 ‘외인’(外人) 혹은 타자들을 양산한다. ‘우리’라는 우리(울타리) 바깥의 타자들은 ‘우리’를 더욱 폐쇄적인 집단으로 만든다. 그들이 무엇보다 우리의 동질감에 균열을 내는 위협이나 ‘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라와 지역과 인종, 정치집단, 종교를 막론하고 전통이 이런 방향으로 길을 걸을 때, 상이한 전통들 사이에는 반드시 비극적인 충돌이 생긴다. 전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 세상에 더 잦아지고 첨예해진 현상이다. 더 심각한 것은, 오늘날 크고 작은 거의 모든 전쟁의 배후에 종교적 전통들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전통이란 주제를 생각할 때, 애초의 동질성을 충실히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는 지성과, 역사의 흐름에 지혜롭고도 유연하게 응대하는 덕성이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맥락이다. 이처럼 전통이 시대착오적 ‘전통주의’(traditionalism)의 위험에서 보호되고, 교리가 두려움에 찬 ‘교리주의’(dogmatism)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 예나 이제나 쉬울 리가 있으랴.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은총의 사건을 통해 이 길을 활짝 열어 주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지금도 대체로 애써 이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paradidomi, 배신과 자기-선사

해마다 성주간 전례에 두 차례 읽게 되는(성지 주일과 성금요일) 수난 복음에 여러 번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그리스어 동사 ‘파라디도미’(paradidomi)가 그것이다.

이 단어는 무엇보다 ‘넘겨주다’라는 뜻인데 우선 ‘배신하다’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예컨대 다음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에 나오는 “넘겨져”란 표현이 그러하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 10,33; 14,10 등과 병행구들도 참조).

그러나 ‘(남을) 넘겨주다’, ‘배신하다’란 단어가 놀랍게도 ‘자신을 넘겨주다’, 즉 ‘선사하다’ 혹은 ‘봉헌하다’란 뜻으로도 나타난다. 바로 요한 19,30의 구절이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숨을 거두셨다’는 표현을 「200주년 신약성서」는 다음과 같이 직역해 놓았다. “예수께서는 식초를 받으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넘겨주셨다.”

마지막의 “넘겨주셨다”가 바로 ‘파라디도미’다. 이렇게 직역해 읽으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운명하시기만 한 게 아니라 당신의 숨-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셨다는 엄청난 뜻이 드러난다! 유다는 배신하여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 그분을 넘겨주었지만, 정작 당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배신당함’으로서의) ‘넘겨짐’을 ‘스스로를 넘겨주심’ 즉 ‘자기 선사’ 혹은 ‘자기 봉헌’으로 ‘성변화’시키신다!

미사 경본의 감사 기도에 나오는 축성 말씀에도 꼭 같은 동사가 나온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tradetur) 내 몸이다.” 이처럼 ‘파라디도미’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용법을 길게 소개한 이유는, 그 라틴어 번역어가 바로 tradere 동사이고 명사형은 traditio(넘겨짐, 전승, 전통)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전통(tradition)의 출처요 원천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paradidomi, 하느님 자기 선사의 전승

이런 생각이 그저 추측에 불과한 게 아니라고 쐐기를 박듯 확인해 주는 구절이 코린토 1서에 나온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공동체에 전할 때도 같은 ‘파라디도미’ 동사가 쓰이는 것이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11,23). 이 문장에서 ‘전해 주었습니다’와 ‘잡히시던’이 모두 같은 ‘파라디도미’이다. 여기서는 ‘배신당하다-넘겨지다’가 공동체와 후대에 ‘넘겨주다-계승하다’로 뜻이 변화되고 있다.

다음 구절은 전승되는 복음 메시지의 내용과 관계된 것인데, 역시 같은 동사가 ‘(후대에) 전하다’란 뜻으로 쓰인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15,3).

전승,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전등

선가(禪家)에 「전등록」(傳燈錄)이란 책이 전해져 온다. 1004년 무렵 북송 시대에 쓰였다고 한다. 제목 때문에 이를 언급한다. ‘파라디도미’ 동사를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전통(傳統)은 하느님 자기 전달 체험의 전등(傳燈)이라 알아들을 수 있다. 당신 존재 전체를 아버지의 선물로 알아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째로 넘겨주시고 선사하셨다. 최후 만찬이 이 첫 ‘전등’의 의례적 표현이라면 십자가에서 수난하고 돌아가신 일은 그것이 사건으로 확증된 것.

전승의 내용(traditium)도 물론 중요하지만, 죽기까지 자기를 넘겨주고 선사하는 전승 행위(actus tradendi)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전승 행위를 자기 선사의 건네줌으로 볼 때, 전통은 답답하게 가두는 무엇이 아니라 빛과 불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네지는 무엇으로 드러난다. 가슴 뛰게 설레는 어떤 것으로 드러난다.

교회 역사의 밤하늘에는 그렇게 스스로의 몸을 건네며 어둠을 밝힌 등불이 빛나고 있다. 유명 무명의 숱한 복음 증인들의 등불이 이렇게 내게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연학 요나 신부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도회 수도자.
미얀마 삔우륀 성요셉수도원 책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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