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장례식을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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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장례식을 준비하라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8.2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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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 [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4
사진출처=covinnus.com
사진출처=covinnus.com

신앙의 무풍지대

과학과 민주주의, 심리학의 발전은 니체가 어느 미치광이의 입을 통해 “하느님은 죽었다...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교회는 장례식을 시작하라”고 말한 것처럼 세속화를 진행시켰다. 루트비히 포이에르 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힘보다 뚜렷하게 더 나은 존재로 상상해 낸 투영물이 하느님이라고 했다. 결국 하느님이 인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류가 하느님을 상상력으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칼 맑스는 종교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의 고통 속에서 천국의 보상을 약속하는 진통제를 줄 뿐이라며,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폄하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생의 환란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강력한 아버지의 형상에 투영된 환영이 하느님에 대한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이런 환상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스 큉은 이전 세계가 “작은 세상에서 큰 교회를 소유”했다면, 지금은 “훨씬 큰 세계의 작은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제 교회와 신자들은 넓은 문화에 소수로 흩어져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의 능력은 세계를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만들었으며, 자연을 이성적으로 다스리고 정복하는 인간의 능력은 일상세계를 더욱 세속화 시켰다.

이제 신앙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앙의 무풍지대’가 시작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사회적 관습이나 물려받은 유산에 따라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 결단, 즉 마음의 변화를 얻고, 오랜 헌신을 감수하는 결단”을 요구한다.

 

교회의 겨울, 헌신과 믿음의 무성한 열매는 떨어지고

이를 두고 칼 라너는 “겨울 같은 나날”이라고 했다. 문화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었던 계절에 번성했던 헌신과 믿음의 무성한 잎과 열매들은 이제 떨어져버렸다. 나무는 헐벗고 찬바람이 불어온다. 그런 계절에 믿음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치 무성한 여름에 하듯 힘을 주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에 쏟아 붓는 것은 적절치 않다. 생존을 위해 신자들은 겨울의 혹한 속에서도 마음을 키우고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가장 깊은 신앙의 핵심으로 돌아 설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 하나의 관심사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다.

라너는 낡은 유신론과 독실한 믿음을 강조하는 성직자들의 강론은 종종 “마치 새가 얼어죽어 겨울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힘없이 강단에서 떨어진다고 썼다. 너무 순진하고 추상적인, 그래서 우상숭배에 가까운 하느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느님을 인간의 경쟁자로서 타자 위에 군림하는 위대한 개인으로 설정한다면, 지금 유신론은 죽었다. 토머스 아퀴나스가 설명한 것처럼, 수세기 동안 하느님은 ‘다른 모든 원인들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설명되었지만, 이제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뭔가 더 나은 것을 열망하기 때문에 ‘질문한다.’ 우리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질문할 뿐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복을 소망하며, 외로움을 알고, 의심하며, 불의에 저항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또한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억압에 맞서 양심을 수호하며,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죄의식을 느끼며, 즐거워하고, 죽음을 슬퍼하며, 미래를 꿈꾼다. 이 과정에서 한계를 인식하며 질문하는 순간이 이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하느님은 죽었는가, 질문하는 순간, 그 죽은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일가,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촉발시킨다. 즉, 관습적인 하느님 이미지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비행기에서 보는 수평선과도 같아서, 아무리 빠른 속도로 날아가도 창문 너머로 더 멀리 펼쳐지기에 붙잡을 수 없는 분이다. ‘신성한 신비’라고 라너가 부른 이 분은 그래서 우리가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분이다. 우리는 어두운 실험실에서 원자를 발견하듯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아퀴나스 조차도 “우리가 하느님에게 갖는 최고의 지식은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놀라운 점은 영원히 이해 불가능한 그분이 이 세계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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