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후질리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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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후질리안입니다
  • 김선주
  • 승인 2023.08.0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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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뜨거운 날들 위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첨벙거리며 빗속을 걸었습니다. 바짓가랑이가 다 젖고 신발이 질척거려도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이렇게 빗속을 개구지게 놀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는 봉숭아 물 든 눈빛으로 쏘아보며 “워디서 이렇게 후질러 온겨~“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옷을 훌렁훌렁 벗겨 쪼글쪼글해진 고추를 마루 위에 올려놓고 마른 수건으로 박박 닥아줍니다. 후질러 온 옷가지들을 다라이에 처박아두고 온 엄마는 홑이불을 몸에 감아줍니다.

할머니가 무쇠솥에서 삶은 옥수수를 꺼내옵니다. 노오랗고 통통하게 알이 박힌 옥수수는 아무것도 넣지 않아도 단맛이 납니다. 홑이불을 온몸에 칭칭 감고 빠꼼히 내민 두 손으로 다람쥐처럼 옥수수를 먹던 날들에서 단맛이 났습니다. 나이테 굵은 툇마루에 할머니와 어머니와 누이들이 조근조근 내리는 비에 마음을 적시던 날, 나는 유난히 빗속을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습니다. 비 오는 날은 개흙마당에 땅강아지처럼 뒹구는 게 참 좋았습니다. 빗방울들이 내 몸에 닿는 촉감이 좋았고, 개흙마당의 부드러운 흙의 촉감이 좋았습니다. 비 오는 날은 후질르기만 해도 삶에서 단맛이 났습니다.

‘후지르다’는 옷가지 등을 빗물이나 오물 등에 적시거나 더럽힌다는 뜻의 충청도 표준어입니다. ‘후지르다’는 원형의 말보다는 ㄹ을 첨가하여 ‘후질르다’고 발음하면 빗물과 진흙의 질감이 더 잘 느껴집니다. 그래서 엄마의 ‘후질러’라는 말을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었던가 봅니다. 백바지를 입고 진흙길을 걷거나 신발에 흙이 묻을까봐 조심조심 걷는 샌님들은 비 오는 날 후질르는 맛을 모릅니다. 후질르는 일에는 나를 구속하고 있는 의복과 일상의 규범들을 망가뜨려버리는 쾌감이 있습니다. 나는 최초로 빗속을 우산도 없이 첨벙거리며 나를 둘러싼 것들을 후질러서 이 세계의 규범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구속하는 거짓들, 엄격한 규범들, 사람을 속이는 위선, 체하는 어떤 권위들이 못마땅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후질르는 버릇이 있습니다. 목사인 내가 교회를 비난하고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도 이런 후질르는 버릇에서 온 것이겠지요. 나 같이 후질르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을 ‘후질리안’이라고 후지게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후질리안들이 역사를 변혁시켰다는 데 조금 위안을 얻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전통에서 보면 분명 후질리안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 안에 있는 정결예식과 절기, 성전 제사 들로 만들어진 유대인의 전통을 후질렀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은 다 후질리안들이었습니다. 마르크스나 체 게바라, 톨스토이, 카프카, 까뮈, 루터, 말콤 엑스 같은 이들은 모두 후질리안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들이 당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적 규범의 틀을 깨고 자신에게 덧입힌 것들을 과감하게 후질렀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빗을 지고 있습니다.

나도 그들에게 진 빗을 갚기 위한 마음으로 가끔은 후질르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한 번 크게 후질렀습니다. <기독교인은 왜 악은 선택하는가>라는 책으로 목사로서의 내 정체성을 크게 후질러버렸습니다. 이깟 목사 가운, 이깟 목사 이름 따위가 뭔 대순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나는 날마다 사표 쓰는 회사원처럼 날마다 내가 속한 이 세계의 교리와 규범을 향해 탈퇴를 선언할 준비를 하고 삽니다. 언제든 벼랑 끝에 서서 나를 던질 준비를 하며 심호흡을 합니다. 옷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옷이 감싸고 있는 진실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과감하게 후질러버릴 각오로 빗속을 뛰쳐나가 천방지축으로 놀아본 자만이 진실의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후질리안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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