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적 교회, 사제들은 공무원처럼 행동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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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적 교회, 사제들은 공무원처럼 행동하고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7.3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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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사랑-1
디에고 리베라, ‘코르테스의 도착’(1951)

1962년 쿠바로 간 도로시 데이의 10월 10일자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궁에서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를 보았다. 마르크스를 닮은 하느님이 농부들을 가르치는 장면. 코르테스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리베라는 오직 적들만 보았다.”

코르테스는 쿠바를 점령하고,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뒤 멕시코를 스페인 왕의 영토로 만든 포악한 인물입니다. 그가 새로운 원정대의 도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형제와 전우들이여, 참된 믿음으로 거룩한 십자가 표지를 따르자. 이 표지 밑에서 우리는 정복할 것이므로.”라고 선언한 깃발을 앞세우고 무장한 부하들을 모았다지요. 멕시코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기도 했던 리베라가 그린 하느님은 어쩌면 코르테스를 닮았는지도 모릅니다. 원수와 싸우다보니, 원수처럼 되었던 것이겠지요.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겠다던 많은 몸짓들이 역사적으로는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는 참혹한 결과를 빚기도 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복이 그랬고, 십자군 전쟁이 그러했지요. ‘영적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계량화’를 좋아합니다. 주민 대비 신자수가 몇 퍼센트인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무한성장을 추구한다면, 교회 역시 성공주의에 골몰하고 번영신학에 심취합니다. 교회를 관료사회로 만들어 사제들은 공무원처럼 행동하고, 세리처럼 은총의 대가로 신자들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어느 퇴락한 기업인이 이야기했듯이 세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하는 하느님은 사실 ‘우상’입니다.

세리와 관료가 지배하는 교회가 아닌...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예수님은 겸손하시니,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인간과 세상을 맞이하십니다.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았던 나귀의 등을 빌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천군만마를 마다하고 고독하게 십자가를 등에 지던 그분을 생각하면, 이제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듯도 합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그날’에 오른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는데,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지긋이 일러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교회의 구조를 보면, 교회가 그려놓은 하느님 모습도 알만 합니다. ‘군주’의 모습이지요. 헤로데에 맞서 싸우다 보니 헤로데처럼 강퍅해지고, 제국에 맞서 싸우다 보니 질서에 집착합니다. 자본에 맞서 싸운다면서 상업화되는 교회 역시 우리 시대의 슬픔입니다. 오죽하면 도로시 데이가 “교회는 나에게 평생 스캔들이었다.”고 말했을까요. 교회가 안에 간직한 보물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인데, 보여주는 모습은 늘 ‘부유한 신사’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사제 직분이란 상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디딤돌이 아닌데 교회 안에서는 권력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배 없이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도로시 데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처럼, 나 역시 교회라는 십자가를 떼어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겠지요.

지금 그대 기침소리 살피는, 교회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우리나라를 다녀가시고,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서, 주교님들도 몇 가지 교회개혁을 위한 제안을 하셨지만 분명한 걸음은 아직 없었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모양입니다. 한국교회는 여전히 교종께서 부탁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요청을 ‘불쌍한 사람을 조금 더 많이 돕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전통적인 의미의 ‘자선’으로만 이해하는 것이지요. 교종께서 마음에 담아 두신 세월호 가족들을 위해서 지난 한 해 동안 뜻있는 사제들과 신자들이 광화문에서 아무리 미사를 봉헌해도, 현장에 와서 미사를 집전해 주신 주교님은 거의 없었습니다. 거리에 나가서 상처받고 멍든 교회, 당장에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는 야전병원인 교회를 교종께서 주문하셔도 그다지 소용이 없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당장에 고통 받는 이들을 돕고, 배제와 차별, 불평등으로 얼룩진 사회에 정의를 이루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그런 세상에서 ‘구원의 성사’가 되어야 하지만, 정작 교회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교종께서 번영하는 한국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셨지만, 여전히 수익사업에 골몰하는 사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조만간 한국교회에서 ‘경영신학’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기업의 CEO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에서, 주교도 CEO처럼 행동할지 모릅니다. 사목은 사라지고 ‘관리’만 남은 교회는 가톨릭교회에 재앙과 같습니다. 그래도 코르테스와 같이 무자비한 주교님이 안 계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마르크스도 아니고 코르테스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입니다. 구체적으로 가련한 일상을 품어주는 사랑이십니다.

그대의 기침소리
허공을 떠돌다
근심으로 찾아든다.
사랑이다.

조희선이 지은 「기침소리」라는 시입니다. 교회의 마음입니다. 복음의 전갈입니다. 뜻밖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한 번 이뤄보자고 나선 길이 사목입니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행여 그림자라도 밟을까 조심하며 걷는 순례에서 저희가 실족하지 않도록 ‘길 떠나는 마리아’에게 간청을 드립니다. 온유한 사랑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 동행이 되어 주십사 청합니다.

이 글이 어떤 이에게는 불편하고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생생하게 행동하는 교회를 생각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참회하고 다시 사랑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 성당을 복원했듯이, 한국교회가 다시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행복한 저녁을 위해 마중 나가는 순간을 기대합니다.

[출처] 한상봉, <행동하는 사랑> 리북, 2015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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