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비판적 글읽기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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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 비판적 글읽기가 필요한 이유
  • 김광남
  • 승인 2023.07.3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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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나오는 얘기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에게는 어린 여자 스토커가 있었다. 베티나는 괴테가 젊은 시절에 잠깐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다. 엄마에게서 괴테의 이야기를 들은 베티나는 한때 엄마의 연인이었던, 그리고 이제는 만인의 우상이 된 괴테에게 미묘한 연심을 품는다.

베티나는 엄마와의 인연을 무기삼아 괴테에게 접근한다. 심지어 결혼하고 임신까지 한 후에도 괴테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계속된다. 괴테는 잠시 옛 연인의 딸에게 끌린다. 하지만 현자였던 괴테는 곧 알아차린다. 베티나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늙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통한 '불멸'이라는 것을. 괴테는 베티나의 애정 공세에 넘어가지 않고 거리를 둔다. 심지어 그녀를 떼어내려고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늙어서 죽는다. 둘 사이에는 베티나의 일방적인 스토킹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적어도 괴테 편에서는 그랬다.

 

괴테가 죽은 후 베티나는 자기와 괴테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아서 책을 펴내려 했다. 그런데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자기와 괴테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크게 실망한다. 자기의 편지는 너무 허접하고 괴테의 답장은 사무적으로 보일 정도로 간결해서였다. 쉽게 말해, 괴테는 그녀를 자꾸 보채는 귀찮은 어린애 정도로 여기며 답장을 했던 것이다. 자신의 편지와 괴테의 답장 모두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녀는 3년여에 걸쳐 자신의 편지와 괴테의 답장 모두를 수정하고, 다시 쓰고, 보완했다. 그로 인해, 1835년에 나온 책 <괴테와 어린 소녀의 서간집>을 읽는 독자들은 괴테와 베티나 사이에 무언가 대단히 은밀한 것이 있었다고, 또 그녀가 대문호 괴테와 겨룰 만한 정치적, 예술적 식견을 갖고 있었다고 여겼다.

한데 1929년에 베티나와 괴테가 주고받았던 편지의 원본들이 발견되어 출판되었다(어찌 된 일인지 베티나는 원본들을 없애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베티나가 자신의 명성(혹은 불멸)을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그녀가 펴낸 책이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바람에 대한 묘사였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글의 위험성'을 새삼 상기했다. 싫든 좋든 모든 글은 작가의 의지(불멸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 글의 소재를 택하는 것부터 그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선택된 소재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작가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는 글은 없고,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마냥 객관적이기만 한 글은 별 의미도 없다.

그러면 작가는 사실을 멋대로 왜곡하는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관건은 사실 자체에 있다. 글이 사실과 다르면 거짓이고, 사실에 부합하면 진실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난점은, 많은 경우, 독자가 어떤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이 결국 그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글뿐이라는 점이다. 독자에게 의심과 비판적 읽기가 필요해지는 이유다.

지금 우리의 왜곡된 언론 환경을 감안한다면, 우리 사회의 매체들이 쏟아내는 온갖 주장(글, 마이크, 화면)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약을 보약으로 여기며 섭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공적 언론이 쏟아내는 주장들의 형편이 그러하다면, 사적일 뿐 아니라 동호회적 성격까지 있는 페이스북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다. 쿤데라의 지적대로, 많은 경우 글과 말은 크든 작든 불멸을 향한 욕구의 표현이다. 물론,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음...갑자기 페북 읽기가 어지러워지는가? 너무 심각해지지는 마시라. 페북 프로필에서 밝히고 있듯이, 나에게 페이스북은 무엇보다도 '놀이터'다. 실제로 밤낮 책상에 앉아 지내는 이들에게는 이만한 놀이터도 달리 없다. 지금 이 글도 잠깐 노느라고 쓴 것이다. 그러니 글이 불편하거나 시덥지 않더라도 그냥 슬쩍 눈 감아 주시라. 나에게는 불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는 재미이니...

 

김광남
숭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동 대학교 기독교학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0년 이상 기독교 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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