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다면, 아미시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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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다면, 아미시 사람들처럼
  • 최태선
  • 승인 2023.07.30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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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모든 인류 문명에서 의복은 사람의 신분을 상징했고, 사람을 구분하는 기재 혹은 도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새들의 깃털과 같이 아름다움을 드러내거나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물론 그런 의복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만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옷, 다시 말해 색상과 모양새가 모두 같다면 그것이 어떻게 보일까?

일단은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는 곧바로 그것이 주사파 공산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개성이 말살된 숨 막히는 삭막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다.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는다면 편할 것 같다. 동물들은 옷 대신 털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똑같지 않다. 그들은 다르고 우리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종으로서 오히려 동물들은 친밀감을 느낄 것 같다.

사람의 경우는 다를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이 보이는 얼룩말의 무늬가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같은 옷을 입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모두가 똑같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옷을 입는다면 최소한 신분의 차이는 사라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욕망의 존재인 인간의 욕망 역시 똑같은 옷에 어느 정도 갇히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똑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모두가 평등해지는 첩경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똑같은 옷을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상이 거의 비슷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측이 가능하다. 그들은 노예였다. 노예로서 그들의 복장은 어느 정도 비슷했을 것이다. 색상과 모양새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Exodus 했지만 Exodus 한 그들의 복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당신들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습니다.”

이 사실이 다만 기적일 뿐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집트 고센 땅의 기후와 광야의 기후는 달랐을 것이다. 만일 다른 의복이 필요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공급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의복을 주시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이집트에서 입고 나온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하느님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의복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모세가 입은 옷은 조금 달랐을 수도 있다. 그는 이집트가 아니라 미디안의 의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양치는 자의 복장이었고, 그것은 가축을 기르는 것이 업이었던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는 오늘까지 교회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복장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성서는 열심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달라야 하고 세상에 동화되지 말아야 할 것을 여러 모로 강조하고 있지만 국가와 혼인한 그리스도교는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오히려 그 반대를 정상으로 만들어놓았다.

내가 의복에 대해 생각한 이유는 아미시의 오드눙 가운데 의복에 관한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켜야 할 관습으로 의복의 색상과 모양새, 모자의 크기를 규정해놓았다. 사실 이 내용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나 역시 이미 세상의 일부가 되어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똑같은 의복의 색상과 모양새, 그리고 모자의 크기(머리의 크기에 상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챙의 크기일 것으로 짐작되는)가 똑같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똑같은 신분이며,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유니폼의 순기능)임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들이 모두 자매와 형제라는 고백이다.

아마도 같은 이유에서 아미시는 보석의 패용 역시 금지한다. 이 역시 의복과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보석의 경우에는 특별히 인간의 욕망과 관련하여 더 많은 경계의 목적을 가질 것이다.

하느님 나라 백성은 같은 것을 먹고 마신다.(만나, 한 상에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동일한 의복을 입는다.

생각할수록 아미시의 의복 규정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강력한 도구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평등을 생활화하고, 그것을 매일 봄으로써 그들의 내면에 그들이 자매와 형제임은 물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교훈을 받는다. 그렇다. 아미시의 옷은 단순한 유니폼의 역할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도구가 된다.

옷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커플 티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기뻐함은 물론 행복해한다. 쌍둥이들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놓고 기뻐하는 부모들의 마음 역시 동일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커플 티는 그들이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과 구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아미시의 동일한 복장은 그런 구분을 사라지게 한다. 적어도 공동체 내에 특별한 사람이나 소외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을 통해 매일 보고 확인하게 된다.

유대인들과 비슷해 보이는 검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아미시 사람들을 나 역시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어딘가 고리타분한 사람들로 보았던 내 시선의 의미를 발견하고 반성하게 된다. 이제야 나는 아미시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로만 칼러나 가운과 같은 성의(聖衣)의 의미를 지우기 위해 애써 노력해왔고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넥타이도 매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만 내가 매일 입는 모든 의복들에 대해서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싼 옷을 입으려 한 적은 없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로 보이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옷을 골라 입었다. 결국 나 역시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의 평등에 대해 말하면서도 정작 그 평등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똑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고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그것이 어렵게 느껴지고 어리석게 보일수록 나는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똑같은 옷을 입지 말아야 할 이유를 수천 가지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난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돈을 주지 말아야 할(선을 행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 나라의 평등은 가장 혁신적이며 가장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도 하느님 나라의 평등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검은 옷을 입은 아미시에게 감사하고, 말없이 하느님 나라 복음을 지키고 실천해온 그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의를 표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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