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시와 하느님 나라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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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시와 하느님 나라 공동체
  • 최태선
  • 승인 2023.07.2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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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오래 전 일이다. 나는 영성수련을 타락한 교회 회복의 단초로 생각하는, 개신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분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분들은 관상기도를 하고 수도원의 덕목인 청빈, 순결, 순종을 지향한다. 또한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분들을 만난 것은 내게 매우 특별한 일이었고,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을 통해 나는 영성과 관련된 가톨릭의 거의 모든 서적들을 읽었고, 그것을 기화로 다른 책들도 많이 읽었다. 이것 역시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들이 지향하는 것은 개신교 수도원이었고, 가장 친밀했던 목사님은 하시던 공동체를 떠나 개신교 수도원을 세우시기도 했다. 내가 그분들과 더욱 가까워지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관점으로 복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분들은 수도원을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이분들과 나는 다른 여러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그분들은 수도원의 전통을 따라 장상에의 복종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 나라의 관점을 따라 공동체에 그 어떤 권위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크게 다른 또 하나의 관점은 그분들은 금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나는 금욕보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분들은 유영모 선생이나 이현필 선생의 동광원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그것 역시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알던 유영모 선생이나 이현필 선생은 이단이거나 기껏해야 기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분들을 통해 그분들의 영성은 물론 오늘날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허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무엇보다 나도 모르게 내게 형성되어 있던 단죄하거나 무시하는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하나 소개하고 싶은 일화는 이분들은 부부관계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분들은 “부부관계를 하고 어떻게 새벽기도를 드리느냐?”는 말을 했다. 그리고 유영모 선생처럼 아내와 해혼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분들의 이런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부관계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의 존재인 인간이 욕망을 정상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편임은 물론, 히브리어 ‘야다’가 ‘알다’의 의미임과 동시에 ‘부부관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친밀한 인간관계를 더 깊이 알 수 있게 해주는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성수련과는 관계가 없는 일반 성도들의 경우도 이분들과 같은 사고를 지닌 분들을 여러 명 보았다. 한 분은 성악을 전공한 분이었는데 “성가대에 서기 위해 주일에는 부부관계를 안 했다”는 사실을 자랑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분에게 유대인의 안식일 규례에 관해 이야기 해주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안식일의 권장사항이라는 사실은 대부분 모른다. 나는 이것이 구약의 관습이 아니라 성서적이며 바른 하느님 나라의 사고라고 생각한다. 영성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쓴 게리 토마스 역시 나와 비슷한 사고를 지닌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쨌든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이 변질된 그리스도교에서 올바른 그리스도교와 복음을 찾으려는 그분들의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내게도 그분들의 그런 사고가 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분들이 수도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분들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영성훈련은 매우 필요한 그리스도교적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사랑이다. 영성훈련에 매진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매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은 무소유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공동의 소유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느님 나라 관점에서 무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의 소유이다. 또한 가족이나 성생활을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창조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도원 운동이 그리스도교 갱신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그리스도교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아니 명심하고 있다. 하느님은 변함없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사랑 때문에 기꺼이 돌이키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통치에 주안점을 둔다면 인간의 모든 생각은 정답이 될 수 없고, 하느님 스스로 인간에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느나님은 비록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중심을 보시고 인간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주목해야 할 곳이 한 곳 있다고 생각한다. 아미시다. 나는 수도원 운동보다 더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을 아미시 공동체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세로 ‘순종’과 ‘겸손’ 그리고 ‘간소함’을 강조하며, 이것들을 실천하는 것을 그들 공동체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삶이란 성서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소박하고 검소하며 감사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용서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서는 서로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사랑은 결국 끝없이 용서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미시는 용서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이어간다.

아미쉬 사람들에게는 '오드눙(Ordnung)'이라는 규범이 있다. 오드눙은 크게 그들이 지켜야할 관습적 규범과 금기 사항으로 나뉜다. 의복의 색상과 모양새, 모자의 크기, 마차의 색깔, 말을 이용한 농사일, 독일어(방언)의 사용, 예배 모임의 순서, 교도들 간의 결혼 등이 전자에 속하고, 전기 사용 금지, 자동차 소유 금지, 컴퓨터와 라디오, TV 소유 금지, 트랙터 사용 금지, 고등학교 이상의 학교 교육 금지, 법적 소송 금지, 군복무 금지, 보석 패용 금지 등등의 해서는 안 될 금기 사항이 후자에 속한다.

나는 아미시의 오드눙이 베네딕투스의 수도회의 회칙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관점으로 보면 오드눙이 매우 이상하거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명문화되지 않은 오드눙이 매우 심오한 말씀의 실천이며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을 반영한 사고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눈에 그들의 사고가 이상해보이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세상적이 되어 세상의 선봉장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오드눙을 깊이 묵상해보면 한 가지, 한 가지가 정말 심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실천에 존경심을 표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고등학교 이상의 학교 교육 금지”는 얼마나 황당해 보이는가? 하지만 나는 이것이 얼마나 고귀한 실천인가를 정말 실감한다. 이들은 작은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오늘날 모든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학력의 차이가 아닌가? 실력의 차이가 아닌가? 그러나 이들은 이것으로 누군가 커지는 것과 하느님 백성들 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방지한다.(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유치원 때에 다 배운다, 결국 인간의 지식이 오늘날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를 초래했다. 화약과 원자력의 발견이 결국 바벨탑이 되었고, 바벨탑은 무너져야 했다!!! 아미시가 이와 대조되지 않는가?)

같은 아나밥티스트이면서 개방적인 메노나이트와 비교할 때 이들은 정말 다르다. 메노나이트에는 신학교가 있다. 그곳에도 대부분 박사과정은 없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행세를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들은 선교도 하고 공동체도 개방적이지만 아미시와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과거의 나는 아미시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아미시가 얼마나 소중한 그리스도교의 유산이자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모범인가를 볼 수 있다. 이들을 통해서 신수도원주의 보다 신 아미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쟁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하느님 나라인 공동체를 아미시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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