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가 피고 노래기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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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가 피고 노래기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 김선주
  • 승인 2023.07.1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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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김선주
사진=김선주

장마는 삶을 눅눅하고 축축하게 만든다. 장맛비는 ‘도를 아십니까?’로 추근대는 길거리 전도자처럼 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방구석에 붙잡아 놓는다. 길고 지루한 장맛비에 집안이 눅눅해지면 이불도, 베개도 옷가지들도 다 눅눅하져서 무엇 하나 꿉꿉하지 않은 게 없다. 집이 눅눅하면 삶도 눅눅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벽지에 곰팡이가 피고 노래기들이 방바닥을 기어다니면 애들은 좀이 쑤신다.

TV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지루한 장마 속에 방구석은 살과 뼈가 부딪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애들은 베개 싸움으로 우당탕거리거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키득거리거나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로 히히거리다가, 분이 뽀얗게 피어오른 하지 감자를 호호 불어 먹다가 모국어를 공책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다가 까무라치듯 잠이 들었다가 다시 밤이 오면 눅눅하고 습한 기운에 꿈마저 뒤척이는 여름 장마는 뼈와 살이 있는 아이들에게 마(魔)가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장마(長魔)였던가.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구석에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면 초가집 흙벽의 황토냄새가 콧구멍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 우리를 노곤하게 낮잠으로 끌어들인다. 깨어있음과 잠 듦의 중간계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빗소리 따라 세상과 나는 가물가물 멀어져 간다.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듯이.

간혹 세찬 비바람이 마루 위까지 범람하여 방문 창호지를 후려치는 소리에 잠이 깨어 다시 세상을 엿보면 이러다 세상이 다 젖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가슴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장마가 오기 전에 마른 흙 한 줌을 회포대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이. 세상을 다 적셔버릴 듯 몇날며칠 퍼붓는 빗속에서 젖지 않은 마른 흙 한 줌은 장맛비에 굴복하지 않은 대지의 승리처럼 생각되었다. 오랜 장맛비에도 끝내 젖지 않은 인간의 대지, 그 위에 발을 딛고 직립보행하는 인간의 의지를 마른 흙 한 줌으로 표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이 다 젖어버린다는 것은 마른 땅에 발 딛고 선 인간을 무르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장맛비는 뼈와 살이 물에 불어 흐물거리다 녹아내리거나 팅팅 불어터진 수제비처럼 맛대가리 없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장마가 내릴 때의 꿈은 장맛비에 젖지 않는 집을 짓는 것이었다. 아무리 긴 장맛비가 내려도 눅눅해지지 않은 집 창가에서 뽀송뽀송한 얼굴로 빗방울을 바라볼 수 있는 낭만적인 삶을 사는 게 꿈이었다.

꿈은 이루어졌다. 지금 나는 넓은 창이 있고 방습이 잘 되는 옥탑방에 살고 있다. 정 눅눅하면 제습기를 켜거나 에어컨을 돌리면 시원하고 뽀송뽀송한 낯으로 창밖을 볼 수 있다. 빗방울이 흐르는 유리창을 바라보며 커피향에 취할 수 있다. 창 밖 옥상에 내어놓은 화초가 빗속에 종아리를 걷고 첨벙첨벙 뛰노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지금 뽀송뽀송한 얼굴로 장마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그런데 뉴스에서 쏟아지는 장맛비는 지루하고 눅눅하다. 마음에 온통 곰팡이를 피우고 삶을 우울하게 만든다. 노래기나 바퀴벌레처럼 빙충맞게 아무데나 싸돌아다니며 역한 냄새를 풍기는, 교양도 없고 상식도 없고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무익하고 악한 대통령 부부는 논둑을 무너뜨리는 지루한 장맛비 같다. 정부 여당 인사들도 하는 짓마다 개흙마당을 늪으로 만들어 발 디딜 곳조차 없게 만드는 장맛비 같다. 들리는 뉴스마다 눅눅하고 우울하다. 내 심장에 곰팡이가 피고 노래기와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다. 이놈의 장마는 언제 그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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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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