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기쁨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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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기쁨이 지나간다
  • 김선주
  • 승인 2023.07.1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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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김선주
사진=김선주

주일 오후 대전 근교에 있는 계곡을 찾았습니다. 며칠 전 장맛비가 온 탓에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흘렀습니다. 계곡물을 끼고 등산로를 걷다가 물에 손을 담갔습니다. 순간 온 몸의 감각 기관이 한꺼번에 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두 손만 물에 담갔을 뿐인데 온몸의 감각이 다 열리고 맑고 시원한 물이 내 몸을 관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물은 그냥 H2O라는 화학 분자의 결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었습니다. 그 생명이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음과 모음으로 발성되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소리가 없어도 말할 수 있고 들리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자연의 언어였습니다. 수 년 전에 호두나무에서 들었던 언어, 거실의 화초에서 듣던 언어, 그 신비한 자연 언어를 이번엔 물을 통해 들었습니다. 물놀이를 하는 주변 사람들의 소음을 피해 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이번엔 발을 담갔습니다. 내 몸이 투명하게 열리고 물이 몸을 관류하였습니다. 나와 물이 분리된 타자가 아니라 하나로 흐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을 감고 마음의 생각을 비우니 물이 흘러 우주의 바다로 나아가는 게 느껴집니다. 마음에 평화가 가득하고 영혼에 향기가 충만해졌습니다. 무한하고 무한하며 깊고도 오묘한 세계, 존재의 기쁨으로 충만한 우주에 발을 담그고 한없이 자유로워졌습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 사실, 사실, 사실들이 사라졌습니다.

그 때 생각 없는 생각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 세계와 자연과 모든 사물들 가운데 하느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주와 세계와 모든 사물들 가운데 유일하신 하느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느님이 깃들어 있는 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심장이 뛰고 호흡하는 동물은 물론 광합성 작용으로 살아가는 초록 식물들도, 돌멩이나 마른 나뭇조각 하나에도 유일하신 하느님의 성품이 깃들어 있음에 대해. 그리하여 하느님은 이 세계에 유일하심을 증명하고 있음에 대해, 생각 없는 생각의 문이 열렸습니다.

세상을 자연과학의 관념으로 이해할 때 생명 없이 닫힌, 죽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세상 가운데 하느님의 임재를 보는 자들에겐 생명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눈을 열어서 이 세계를 보면 자연과학적 질서를 볼 수 있지만, 영혼의 눈을 열어 보면 세계의 모든 사물에서 생명의 신비를 볼 수 있습니다. 물이 나에게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고 무슨 의미인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통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바람이 나를 관통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206개의 뼈마디와 근육과 지방과 내장의 장기들을 지나가는 바람을 볼 수 있습니다. 나 또한 강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타자의 생명을 진심으로 마주하게 되면 내 생명의 신비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욕망하다 늙어서 죽는 두 발 짐승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 웅숭깊이 고여 있는 내 생명의 신비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자의 생명에 눈 뜨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그 생명을 통해 말씀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흐르는 하느님의 숨결, 그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 안에 생명의 신비가 살아 숨을 쉬게 됩니다. 신비란, 일상으로부터 멀리 있는 초월적 경험이 아니라 바로 내 옆을 흐르는 강물처럼 발을 담그기만 하면 열리는 우주적 경험입니다.

며칠 전 아무개 교수와 즐거운 여행을 마친 후 저녁 식사에서 그의 태극기부대 같은 정치 논리에 영혼이 오염되는 것 같았는데, 이 하나의 신비한 체험으로 마음이 다 씻어졌습니다. 참 신비합니다. 생명과 생명이 만날 때 신비와 기쁨이 있다는 걸 느낍니다. 세상 모든 걸 생명으로 보는 눈만 열면 되는데, 그 눈이 열리지 않아서 다들 고통 받고 삽니다. 하느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자연과 만물 가운데 느껴야 하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느껴야 내 안의 생명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생명은 생물학적 ‘살아있음’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세상은 기쁩니다. 그 기쁨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저기 기쁨이 지나갑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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