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삶의 주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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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삶의 주인일까?
  • 최태선
  • 승인 2023.07.10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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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by William-Adolphe Bouguereau
by William-Adolphe Bouguereau

오늘 아침 글을 하나 읽었다. 강남순 교수의 글이다. 나는 늘 그의 글을 읽는다. 배우는 경우도 있고, 공감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의 날카로운 지적이 맘에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의 글의 취지에 동감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오늘 글이 바로 그런 글이었다.

< “나의 삶의 주인은 나”: 죽음과 삶의 부정을 넘어서 긍정으로 >라는 글이었다. 그 글의 결론은 이렇다.

"이 삶의 즐겁고 밝은 면만이 아니라, 지독한 어두움, 불안, 우울함 등 어두운 면까지 모두 끌어안으시기를, 그리고 '나의 삶의 주인은 바로 나다 (I am the owner of my life)'라는 니체의 선언을 친구로 삼고서, 오늘 하루도 각자의 자리에서 홀로-함께, 힘찬 걸음을 내딛으시기를.“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글을 많이 쓴다. 나는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종교학자들의 경우는 대부분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의심하게 될 때가 많다.

어쨌든 그의 글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주인이 “나”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상관없다. 생각은 자유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생각이다.

나는 그가 장성한 그리스도인이고, 내가 아직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칼 라너가 “하느님이 없다.”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그런 하느님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지적은 그의 신앙의 표출이었다.

나는 강남순 교수 역시 라너와 마찬가지로 역설처럼 잘못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나 그리스도인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천한 나는 그럴 수 없다. 미천한 내 생각으로는 탁월한 그의 말을 수용할 수 없다.

손자가 많이 컸다. 이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하려 한다. 녀석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내가"다. 그래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기가 한다. 그러나 하다가 어렵거나 할 수 없으면 "할아버지가 도와주세요."라고 한다. 녀석은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이 할 수 있으면 반드시 자기가 한다. 하지만 자기 혼자 못하는 일이 있으면 주변의 엄마, 아빠에게 혹은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어제는 공원에 손자를 데리고 물놀이를 갔다. 녀석이 은근 겁이 많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을 보고도 망설인다. 그러면 나는 그 녀석을 안고 물이 쏟아지는 곳이나 조금 깊은 곳엘 간다. 그곳에서 물을 만지게 하거나 물이 쏟아지는 곳에 녀석을 놓고 “무서워?”라고 묻는다. 그리고 “할 수 있어. 문제없어.”라는 말을 하게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녀석에게 혼자 해보라고 하거나 들어가 보라고 한다. 녀석은 영악하다. 혼자서는 결코 하지 않고 내게 안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녀석은 적응하고 무서워하지 않고 혼자 하는 법을 배운다.

매우 유치한 비유이다. 하지만 나는 손자와 나와의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을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복음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나와 같이 미천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복음이 탁월한 이성의 소유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경륜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하느님은 인류는 물론 온 피조세계를 구원하려 하신다. 물론 그리스도인들(하느님의 아들[자녀])을 통해서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손자의 이야기를 한 것은 손자와의 삶을 통해 신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란 내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내게 의지하는 손자와 같이 하느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사람이 탁월한 이성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헨리 나웬 신부의 <아담>이라는 책에 나오는 중증 정신 및 신체 장애인인 아담과 같은 사람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주인이 그리스도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맹목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주인으로서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과 하느님과 동등한 주님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일방적으로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반드시 인간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신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의 ‘아케다 사건’은 하느님과 인간의 자발적 동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아들의 목에 칼을 꽂아 죽인 후 번제로 드리라는 하느님의 요구는 어떤 이성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제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하느님의 요구에 순종한다. 그것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의 주인이 온전히 하느님이 되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브라함 역시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로봇이 아니었다. 그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느님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의 주인의 자리를 보존했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고 생각한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다.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 충돌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아버지가 그분의 주인이심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 사건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맹목적인 로봇이 아님 역시 입증하셨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은 모든 사색이 끝난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의미한다.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주장은 아직 신앙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신앙을 끝까지 거부할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뜻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애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기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기 위해 나는 바보도 그냥 바보가 아닌 맨바보로 살아간다.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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