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변방에서 신학하기
상태바
교회의 변방에서 신학하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6.27 0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 칼럼

교회와 세상의 경계에서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 가운데 지금도 성당에 나가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이걸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친구를 만나면 그저 웃을 뿐입니다. 이들을 두고 ‘쉬는 교우’ 또는 ‘냉담자’라 부르기는 민망합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을 뿐 예나 지금이나 참 잘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구석에서 소리 없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며 복음적 진실을 사는데 부지런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선배는 제가 본당에서 일자리를 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나오려던 곳으로 아예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것인지” 물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선 반농담으로 때가 되면 “교회를 졸업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낭자하던 시절도 있었던 탓입니다. 교회 역시 나룻배와 같아서 강을 건너고 나면 두고 가야지 짊어지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교회와 세상만큼 흠결 많은 이가 ‘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승에서 강을 다 건널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합니다. 강을 건너 다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그 강에 남아서 아직 건너지 못한 이들을 위해 노를 젖는 뱃사공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지금 교회 문턱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곳에서 교회 안팎을 들러보고, 경계 안이나 바깥에서 필요한 일을 하려는 것이지요. 어디든 먼저 부르는 이에게, 누구든 다급한 이에게 시선을 돌리고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며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명시적으로 고백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삶이 값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토마시 할리크 신부(사진=한상봉)

신앙, 숨어계신 하느님과 더불어 살기

어쩌다 보니, 요즘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상처입은 신앙>이나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은 퍽 감명이 깊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조차 토마스 사도가 만져볼 수 있을 만큼 몸에 선명하게 패어 있는 상처를 그대로 갖고 계셨다는 이야기는 타인의 고통과 내가 겪고 있는 고통 안에서 그분을 만나라는 전갈로 들렸습니다. “상처가 없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선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 교회에서 선교적 열정이 살아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당신의 권능으로 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고통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길이 없을 테지요.

할리크 신부님은 “하느님 없는 세상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고는 종교적 추구의 의미,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일과 그 세 얼굴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고통스런 일상을 견뎌야 하고, 주류사회/교회에서 변방으로 떠밀려난 상황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기란 참 어렵지만, 한편으론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이 더 필요하다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아델 베스타프로스는 “다른 이를 참아주는 것은 사랑이요, 자신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이며,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안전과 평온함, 기득권과 자유를 포기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현존을 쉽게 손닿을 수 있는 곳에서 느낄 수 있다면, 신앙생활을 참 편하게 누릴 수 있겠지요. 돈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신앙생활은 유감없이 풍요로워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할리크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차가운 밤, 우리 삶과 세상이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어스름한 순간에 신앙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신앙이란 사실상 명백한 ‘신앙고백’과 다르게 “숨어 계신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합니다.

 

그림출처=orthodoxartsjournal.org
그림출처=orthodoxartsjournal.org

교회도 모르는 성인

하느님이 은밀하게 숨어 계신 분이라면, 그처럼 은밀하게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도 있겠지요. 교적에 올라와 있지 않지만, 사실상 복음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웃집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암묵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성인으로 시성되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할리크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총애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하느님의 은밀한 마음속, 그분의 ‘가슴 속에서’(in pectore) 부러운 보호를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교황청 시성성에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 주시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는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알려준 이들도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며 강하게 그리스도교를 비판했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반그리스도 Der Anti-christ>에서 그리스도교가 고대세계의 하층사회에서 발생했으며, “가련한 자, 스스로 고난받는 자, 죄책감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자, 영혼의 게토에 모인 사람들, 모든 실패한 자, 나쁜 길로 들어선 자, 인간쓰레기들을 설득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는 “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주인의 가치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니체는 비판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천한 죄인들에게 복음”인 종교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셈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니체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발언을 듣게 됩니다.

“천한 민중, 추방된 자, 죄인을 지배질서에 대항하도록 불러 모으는 이 ‘거룩한 무정부주의자’는, 오늘날에도 시베리아로 전해지고 있을 복음이 믿을만하다면 한마디로 정치범이었다. ...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그는 십자가에 달렸다.”

이런 예수님은 우리 교회가 잃어버린 그리스도입니다. 시몬 베유는 <신을 기다리며>에서 몸은 늘 교회 안에 머물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그분의 정신을 널리 전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그분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께 충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비주의자’로 불리워졌던 시몬 베유를 도로테 죌레 같은 신학자들은 ‘현대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정작 시몬 베유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가톨릭신자가 아니었던 거지요. 교적 없는 시몬 베유가 평생 가톨릭교회와 영성을 사모하면서도 입교하지 않은 이유는 교회와 세상의 경계에 머물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에서 교회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을 보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성인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복됩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6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