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들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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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들과 어떻게 관계맺고 있습니까?
  • 최태선
  • 승인 2023.06.2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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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지난 16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제 결혼식에 회사 동료가>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A씨는 "하객 인사할 때 보니 한 회사 동료가 남편과 애들 2명을 데리고 와서 4명이 식사 하더라"라며 "친한 친구도 아니고 그냥 아는 정도의 동료인데 나중에 보니 축의금 5만원을 냈더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어떤 개념이 탑재돼 있으면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을까 싶다"며 "평소 속 좁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가 안 된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서울경제> 기사 참고)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이 기사에서 우리 시대의 박살난 “관계성”을 본다. 관계성이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돈”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는 우리 시대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돈이 관계성을 대체했다. 이제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위 기사를 읽고 사람들은 5만원을 내고 4명이 식사를 한 이 사람을 파렴치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이 정말 파렴치한 사람일까? 파렴치한 사람일 확률이 더 높다. 오늘날 결혼식 식사 비용은 대부분 일 인 당 5만 원이 넘는다. 10만 원이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그 이상인 경우도 많다. 결혼식을 치르며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결혼 당사자들을 생각한다면 5만 원을 내고 4인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분명 양심 없는 행동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고의 밑바탕에 돈이 자리하고 있고, 관계성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글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다. 오래 된 일이지만 작은 아이의 돌잔치를 뷔페에서 했다. 정해진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예배를 드리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물론 우리는 그 삼십 분 전에 예약을 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배란 불편한 시간이다. 잔치에서 그런 불편함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돈 봉투를 받지 않았다. 잔치란 품앗이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축하의 의미와 관계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호텔의 뷔페였으니 일인당 식사비가 적지 않았다. 한 후배가 와서 내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다 봉투를 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와 준 것 만으로도 고맙고, 기쁜 날, 내가 식사 대접 하는 것이니 편하게 먹고 가라고 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관계성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하였다.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큰 아이의 결혼식 때도 청첩장을 아무에게나 돌리지 않았다. 나는 친척들을 포함하여 여덟 장의 청첩장을 보냈다. 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내 인생의 어떤 것도 돈으로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게 하며 살았다. 정말 와서 축하해주어야 할 관계가 청첩장을 보낸 기준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성이란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관계성이다. 그리스도인의 관계성은 영원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관계성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식적인 선에서 모든 일들을 결정한다. 그래서 내가 오늘날 교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관계성이란 가장 중요한 한 가지이다. 그러나 조직이 되어버린 오늘날 교회들은 그러한 관계성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고, 그것은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종교놀음이 되게 만들었다.

예수님이 하시려 했던 일의 핵심은 제자공동체의 건설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제자공동체였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예수 공동체인 제자 공동체의 목표는 변치 않는 사랑의 관계, 즉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잘 살펴보라. 독신인 그리스도인이 가정이 있는 그리스도인 가장을 위해 대신 사형을 당한 이야기가 있다. 꼭 필요한 하느님의 사역을 할 사람을 위해 대신 감옥에 갇힌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물론 오늘날의 법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가능했고 믿을 수 없지만 대신 사형을 당한 사람도 있었고, 대신 감옥에 갇힌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관계성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했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죽음까지도 그 관계성을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인용한 기사에서 보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관계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거나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돈이다. 그들의 눈에는 돈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에 축의금 5만 원을 내고 4명이 식사한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 된 것이다.

나라면 그 같은 경우에 꼭 사진을 찍고 가라는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결혼식에 와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자녀들까지 대동하고 결혼식에 와 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고 그런 사고의 저변에 관계성이 자리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제자공동체가 그런 관계성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잠시 뒤로 물러날 것이지만 그런 그들을 티베리아스 바닷가로 모이라고 하신 것이다. 서로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관계를 가진 제자공동체를 마침내 예수님은 확인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실 수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이루어진 그 관계성을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갑작스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당황했고,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가거나 관망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실패야말로 그들의 관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험의 기회가 되었다.

물론 그들은 티베리아스 바닷가에서 주님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부활을 상상할 수 없었고, 주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았지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그곳에 가서 머물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주님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그곳에 나타나셨다. 그들의 감정을 우리는 짐작할 수 없다. 그들은 죽을죄를 지었다고 무릎을 꿇어야 할지 부끄러움에 다시 도망을 가야할지 반가움에 주님을 향애 달려가야 할지를 몰랐을 것이다.

베드로는 수제자답게 겉옷을 벗고 물로 뛰어들었다. 주님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가장 부끄러웠을 그가 어떻게 주님을 향해 갈 수 있었을까? 이미 이루어져 있던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그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기에 아침을 준비해 놓고 그들을 맞으셨다. 그러나 이 행동은 단순히 어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연출이 아니었다. 실패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돌이킴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돌보아주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성이었다.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과의 관계성 위에서 “내 양을 먹이라”는 위임을 하셨던 것이다.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은 제자들과 주님과의 관계와 같은 관계가 기초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관계성 위에 교회를 올려놓았고, 주님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섬기고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재현한 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던 이 관계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온전히 사라진 것이 바로 이 관계이다. 이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오직 유일한 복음 전파의 방식이다.

축의금 5만 원을 내고 4명이 와서 식사한 사람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이 질문으로 당신을 점검해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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