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지나면 노래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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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지나면 노래가 남는다
  • 심광섭
  • 승인 2023.06.1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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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섭의 예술과 신학

6월 10일 노원역 부근 책방 봄에서 임동확 시인 두 번째 산문집 <시는 기도다> 북토크에 다녀왔다. 지난 5월 김지하 시인 1주기 추모 문화 및 학술제에서 만난 임동확 시인, 그는 석사와 박사 논문을 김지하를 연구해 제출했고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최소한 5년 이상이 걸렸을 거다. 나는 간헐적으로 김지하 시인의 글을 읽었지만, 그는 집중적이며 지속적으로 읽고 깊이 읽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논문을 쓴다는 게 그런 과정을 수반하는 거 아닌가. 그가 집중적으로 만난 시인을 접화(接化)하고 싶었다. 한꺼번에 두 시인을 만나는 것이다.

산문집 제목이 <시는 기도다>였다. 이 책은 시성(詩性)과 영성(靈性)의 두 줄기를 엮은 동아줄일거라고 예감했다.

나는 ‘기도는 시다’, 시여야 한다, 라고 말해 왔다. 한 편의 시가 나오기 위한 오랜 느낌과 체험, 언어의 선택을 위한 고민과 숙고, 행을 이어 연과 연으로 완성되는 한 편의 시는 신의 창작이랄 수밖에 없는 경이로움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원, 탄식, 외침, 절망과 희망, 기쁨과 슬픔, 증오와 사랑, 저주, 감사와 찬양, 이런 감정들이 정제되어 신에게 봉헌되는 것이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시처럼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를 짓는 시인에게 ‘시는 기도다’. 내가 생각한 기도와 시인이 생각한 시가 만나는 그 사이의 공간이 어떻게 빛날까, 궁금했다. 들뢰즈는 모든 것이 “언제나 중간에서, 사이의 것으로, 중간의 존재인 간주곡”이 되는 장소인 “사이”에서 진동한다고 말한다. 중간(the middle)! 사이(Between)!

6월 10일(토)은 가나안교회가 충북 영동의 여포 와이너리를 1박2일 방문하는 날이기도 했다. 6월 10일은 슐라이어마허 제9회 학술발표회가 신촌에서 오후 2시부터 5시 40분까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갈림길에서 나는 영동을 접어두고 신촌과 노원을 택하였다. 그리고 신촌에선 발표 1만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철을 타고 중간에서 갈아타고 드디어 노원역에 3시 45분경 도착했다. 10번 출구를 찾아 나가려는 순간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는가. 비 예보는 전혀 없었다. 역내를 두리번거렸으나 우산을 파는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슬렁거리며 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데 도무지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하여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4호선을 타고 귀가, 인덕원에 내렸더니 여기의 하늘은 맑고 여기의 길은 젖은 흔적이 하나도 없다. 하여 나는 가고 오는 전철 안에서 북토크에 참여한 것이다.

광주 5.18, 회복 불가능한 개인적 상처와 아픔

임시인에게 시는 “어떤 ‘겉사실’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속사실’의 대상이다.” “더 현실적인 ‘속사실’” 이란 뜻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평생 사라지지 않는, 잊을 수 없는 real reality, 때로는 분출된 싯벌건 용암으로 사방팔방을 순식간 덮어버리는 분화구요, 때로는 파도 일렁이는 바다요, 때로는 푸르디 푸른 하늘이란 말일 것이다.

시인에게 그 속사실은 대학 2학년 전남대학교 문학부 학생시절 맞은 1980년 5.18이다. 시인은 이 참극(慘劇)의 덫에 걸려있고, 그 그물 안에 갇혀 있다. 그는 이 경험을 “거의 회복 불가능한 개인적 상처와 아픔”(264)이라고 술회한다. 하지만 그 덫과 그물은 단지 가위눌림과 악몽이 아니라 시의 “외침이 터져 나오는 자리”이며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다.

나는 5.18을 상병에서 병장으로 넘어갈 즈음에 군대 안에서 들었다. 뭔가 모르는 초조함, 불안, 군인교회에 나오는 수송부의 많은 교우들이 광주에 원하지 않는 진압군인 신분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원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실상과 실상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제대하고 한참 지나고나서였다.

내려치는 계엄군의 곤봉에 무방비로 맞는 젊은이들, 무참히 구타당하는 장면,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는 모습, 최루탄 속의 죽기 저항, 무엇보다 아들의 영정과 혹은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들..... 이 장면을 보고 함께 오열하지 않을 자 있으랴! 시인은 이 참상을 한 복판에서 체험했으리라.

매장 시편

왜 한국 근대사는 이런 비참한 비극이 연속되는 역사인가? 갑오동학혁명운동,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해방이후 곧 분단과 6.25 전쟁, 4.19 전후,... 그리고 70년대 유신체제.... 아! 광주... 그러고도 이 징글맞은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신성만이 끝이 없는 법인데, 우리 역사의 안에는 비극이 똬리 틀고 있는가 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신성은 아픔이고 설움이며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꾸만 역사적으로 위험했던 순간들이 끊임없이 소환되고 영혼의 삶은 늘 비상사태이다.

시인이 악몽에서 깨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우리 민중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아니, 내가 1980년 5월을 내 삶과 문학의 화두로 삼은 것은 필사적으로 그런 역사의 대극에서 생의 신비 또는 황홀함을 찾고자 함이었다.”

시인은 비극적 생의 신비 혹은 황홀함(탈자태)을 첫 시집인 <매장시편>(1987)에 슬어냈다. 시인은 1980년 5월 강제로 잉태된 시의 씨앗을 7년 몸맘(뫔)알이 하면서 때가 왔을 즈음 출산하기 위해 마침내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지금의 아내 권유로 구례 화엄사 지장암에 칩거하여” 아프게 낳는다. 매장, 5.18을 매장으로 표현해야 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매장을 떠올린다. 겟세마네의 어두운 밤, 새벽부터 시작되는 수난의 시간들, 심문, 조롱, 채찍, 십자가에 못 박힘, 십자가상에서의 단말마의 외침, 그 외침의 단단한 씨앗인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유기), 다이룸과 내맡김,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옴,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매장, 매장 이후에도 우리는 곧 수장을 경험하고 이어 집단 깔려죽음(압사)을 경험해야 했다. 마음의 고통은 안으로, 속으로 삭히고 축적되어 심오한 영성가를 만들지만 몸의 고통은 안으로 축적된 에너지를 분출시키고 발산하게 만들며 끝내 폭발하여 호연(浩然)한 혁명가를 만든다. 혁명과 개벽의 에너지로..... 아주 작은 몸의 고통도 반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무반응은 무감각이고 죽음이다.

아직 부활의 노래 부를 수 없다

<매장시편> 이후 김광규 시인으로부터 “이젠 부활시편을 써야지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난 성 금요일과 부활절의 3일이 너무 짧을 뿐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이제 교회 안에서 기계적으로 도식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의 죽음과 매장 후에는 곧 부활이 올 것이니 희망을 갖으라, 라는 식이고 입에 발린 공허한 소리다.

<성령과 트라우마. 죽음과 삶 사이, 성토요일의 성령론>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십자가에서 곧장 부활로 직선적으로 이어지는 “허울 좋은 구원”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가장 큰 적”이라고 역설한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을 이긴 승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은 죽음 한가운데서 끈질기게 버티는 것이며, 그들의 삶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 구원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거나 어떻게든 죽음이 종결되는 행복한 승리의 끝맺음으로 그려진다면,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경험은 이야기되지 않은 채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임동확은 이런 염려를 말끔히 씻어준다. “내가 ‘부활의 노래’를 부르기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직도 너무 많은 어둠과 죽음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시인은, 예술가는 아니 시인과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비극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묻는 존재다. 아니 묻기 이전에 씨알 민중은 이미 그렇게 일상을 살아 왔다. 우리의 아리랑이 그 예다.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특히 정선 아리랑, 시인은 “참담한 비극의 삶 속에서도 충만한 기운에 전율할 줄 아는 예술이 가져다주는 참된 미적 혁명의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시인은 자신의 시학을 생성의 사유, ‘생성의 감응학’, ‘생성론’, ‘생성의 미학’이라 칭한다.

“고통이 지나면 노래가 남는다”(우즈베키스탄 격언, 157)
고통은 체화된 그 자리에서 노래를 낳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비극에서 창발하는 예술, 고통의 무덤이 열려 터지는 부활의 기쁨을 <소년 뱃사공과 새로운 동학신화의 가능성>에서, <미완의 완성지 운주사의 새벽>에서 “땅끝, 또 다른 시작의 해남 기행” 등, 또한 여러 미술가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모색한다. 그중에 인상 깊었던 산문은 수화 김환기 화백의 고향 안좌도 탐방 이야기이다.

“그(김환기)는 새로운 세상과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배반하는,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적 좌절과 실패에서 오는 설움과 한의 감정에 매몰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슬픔과 결핍의 세계 그 자체에 머물지 않은, 신명과 결합된 환상적이고 심미적인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꿈꾼다.”

고 김환기 화백의 푸른색 전면점화 '고요(Tranquillity) 5-IV-73 #310'
고 김환기 화백의 푸른색 전면점화 '고요(Tranquillity) 5-IV-73 #310'

절망적 현실에 명랑해지기

“얘들아, 시는 기도란다. 모든 예술은 기도야. 하늘에 닿기 위한 기도. ... 그래야 붕붕 날아올라 하늘에 닿지. 시는 그렇게 모든 것 버리고 가벼워지는 거란다.”(19)

무겁고 절망적이며 우울하기만 한 현실 속에서 가벼워지기, 명랑해지기, 기쁨과 즐거움 맞이하기.... 그래서 이제 그의 광주 기행은 “즐겨라, 오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 되는 것일까. “무등의 아침 햇살을 보며” 함께 아파하거나 기뻐할 수 있는 마음, 역사적 참혹극 속에서 상실했던 “천진(天眞)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시인의 염원은 공감을 탄다.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불의한 가난, 강제된 가난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자발적 가난’의 길을 시인도 “예술가의 길”이라고 말한다. 무상(無償)한 가치와 무애(無碍)한 자유에 대한 꿈, 인간 생성의 에너지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제 80년 5월의 비극은 “온갖 개념을 뛰어넘어 의미를 생성하는 그 무엇이다” “사물들이 춤추게 하려면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멜로디를 연주해주어야 한다.”

5월이 재생과 부활의 축제가 되기를 희망하는 시인의 마음, 특히 축제는 “인간의 한계 또는 고통의 극단 속에서 언어를 상실하거나 세계가 차단되는 경험 속에서 타자와의 소통 내지 공감을 얻을 때 더욱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해방과 십자가의 정의(正義)를 거쳐 부활의 축제에 이르는, 절망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신학자 몰트만과 많은 점에서 시인의 산문집은 통하고 공명된다. 시인의 산문집은 목하 신학 독서회에서 읽는 몰트만의 <살아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과 이중주, 듀엣으로 노래한다.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1985)
독일 베텔신학대학(Kirchliche Hochschule Bethel) 신학박사(1991)
(사)한국영성예술협회_예술목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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