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적 구원관, 신앙인의 거지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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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적 구원관, 신앙인의 거지근성
  • 김선주
  • 승인 2023.05.1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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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나는 목사다. 그런데 난 기독교에 대해 절망할 때가 있다. 기독교의 세계관과 구원관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경직되어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 때다. 그런 교회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난 두렵다.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을 만나면 난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쳤나, 라고. 우리는 많은 부분을 예수가 가르치지 않은 영역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에 절망하는 대목이다.

교리적 단순성, 그 경박하고 무지한 열정이 사람을 찌르고 들 때 오히려 사람은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 것을 분리주의적으로 생각하여 우리 편과 우리 편 아닌 것들로 나누어 대립시키고, 우리 밖의 존재들을 타자화시키는 것을 구원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는 불편하고 두렵다. 어쩌면 많은 교회 사람들이 이런 거짓 구원에 속고 있다. 구원이란, 교리적 경계선 안에 나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을 믿는 일이 에고(ego)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분법적 구원관에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욕구를 채워달라고 애걸복걸 기도하게 된다. 이것이 교회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방식이다. 자기포기를 통해 타자에게 구원의 문을 연 예수의 십자가를 점령군의 깃발처럼 흔들며 노래하는 게 교회 사람들의 모습니다. 이 경박한 에고이즘이 기독교의 전부라면, 기독교는 일고의 가치도 없이 예수에게 버림받아 마땅하다.

기독교가 너무 단순하고 경박해졌다. 여백도 없고 깊이도 없다. 자기 안으로 들어갈 줄 모르고 밖으로만 분출하려 한다. 경박한 기도 이벤트를 통해서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듯이 몰아간다. 종교 이벤트를 통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결속시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벤트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이 ‘구원’, ‘은혜’ 같은 바울로의 용어들이다.

예수가 나 대신 죽어 줌으로써 내가 구원받았다는 대속적 구원관, 어떤 경우에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교리가 교회 사람들에게 공짜 점심을 얻어먹으려는 거지 근성을 갖게 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타자의 희생을 통해 얻게 된 자기 이익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자기 죄(카르마)를 은혜를 통해 쉽게 용서받으려는 값싼 종교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싸구려 의식 때문에 이승만 장로 대통령은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도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을 수 있다. 국가를 자기의 수익모델로 삼았던 이명박 장로 대통령 역시 거짓과 탐욕에 물든 삶을 살았으면서도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교리적 신념에 빠졌을 것이다. 자기 삶과 행위에 대해 인과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교회 사람들의 의식이 그렇다. 자기 카르마를 모두 은혜로 지우고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사람들의 모습이다.

카르마(karma)는 우리 말로 업보(業報)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카르마는 어떤 일에 대한 인과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특히 사람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두고 카르마라 한다. 인도 종교는 인간의 카르마 때문에 환생이 반복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카르마는 단순히 인도 종교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 특히 원죄가 사라지지 않고 인간 안에 잠재된 채로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환생‘이란 말과 ’원죄‘라는 말은 동의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카르마(원죄)를 예수의 십자가가 한꺼번에 다 지워버렸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에겐 카르마가 없다고 믿는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을 경박한 에고이스트로 만든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미국인들의 영혼을 깨운 명상 수행자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명상을 통해 하느님 안으로 우리의 본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명상이란 내면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바라봄으로써 신성한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요가난다는 ‘우주의식’이라고 말한다. 요가난다는 자기의 카르마를 바라보고 하느님의 신성 안으로 들어갈 때, 환생의 순환 고리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기독교 어법으로 말하면 이렇다. ‘인간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할 때, 죄에서 자유케 되고 구원에 이른다.’ 요가난다가 말한 ‘하느님의 신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교회가 말하는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은 같은 뜻이다. 자기 카르마를 바라보고 내 안에 거룩한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엎드리는 게 죄의 순환 고리(환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요가난다는 이렇게 말한다. “내면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찾으라.” 난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경박한 기도 이벤트가 아니라) 내면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찾으라.”고. 이제 우리는 은혜에서 카르마로, 그리고 다시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

삼인 출판사에서 요가난다의 책을 이현주 목사님이 번역하여 냈다. <카르마와 환생>이라는 제목으로. 요가난다의 여러 책들과 어록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가벼운 볼륨의 책인데 무게가 만만치 않다. 잔치국수 한 그룻 후루룩 말아먹을 정도로 가볍지만 맛이 깊고 풍미가 있다. 누구와도 견주기 어려운 이현주 목사님의 번역 문체 덕분이다. 번역문의 문체가 이렇게 아름답고 영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현주 목사님의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느낀다. 한 권의 책을 꽃을 보듯 하는 게 얼마만인가. 책에서 빛이 나고 향기가 난다. 꽃처럼 아름다운 책이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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