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달라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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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달라야 정상이다
  • 최태선
  • 승인 2023.04.2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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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마트에 가는 길에 교회들이 여럿 있다. 그중 가장 큰 교회는 그야말로 가는 길목에 있다. 그 교회 주차장을 지나는 것이 지름길이다. 사람들도 대부분 그곳을 지나간다. 길이 평평하기에 다니기가 좋다. 나도 처음에는 그곳으로 지나다녔다. 그러나 어느 날 주차장 끝에 있는 입구에 쓰인 커다란 경고문을 보았다.

“신천지인은 출입을 금합니다.”

마음이 불편하다. 아마도 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안다면 대뜸 신천지인 취급을 할 것이다. 신천지인이라는 말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천지 교인이라는 말도 웃기고 신천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말도 그들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 "신천지인"이라는 말은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느님 나라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천지다. 그러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신천지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신천지인이라는 경멸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야말로 신천지인이라는 생각이 든 후에는 경고문에 따라 그곳을 밟지 않게 되었다.

요즘 들어 부쩍 길에서 과자나 사탕 한 알을 호치키스로 붙인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들이 교인이 줄어 비상이 걸린 것이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정말 ‘너나 잘 하세요’다.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하는 이들은 구원파다. 구원을 인간이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없다는 말과 같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예수 믿는다고 말만 하면 된다. 나는 그런 구원을 받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오는 천국에는 가고 싶지 않다. 지금도 지긋지긋한 그런 사람들과 영원을 함께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다.

어제는 동기 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만나는 분이다. 일전에 나를 교사수련회 강사로 초빙했다가 나와의 관계를 끊은 친했던 목사가 있다. 그 목사와 가장 친한 분이다. 그래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그 목사가 잘 지내느냐는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낸다고 했다. 그 목사의 아내가 암투병 중이어서 아내의 안부도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마침 어제 그 목사를 만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신학이 다르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말 신학이 다르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내 전화를 받지 않게 된 그 목사에게 나를 강사로 부르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다. 오늘날 교회의 사고에 맞지 않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럼에도 그 목사는 나를 불렀고, 결과적으로 관계가 단절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정말 난공불락이 되었다. 교회가 영원한 개혁의 대상이라는 신학의 화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믿는 교리에 어긋나면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개혁을 하겠다는 것인가. 교회가 김일성 가문의 디엔에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된다. 자기가 중심이다. 자기가 중심이 되면 변화도 가능하고 개혁도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가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면 태도가 돌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렇게 죽일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최소한 관계를 단절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그 목사나 나를 배척하는 사람들만의 행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말은 이것이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뱉어야 할 말이 아니다. 만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소수 종교로 고착되었다가 당시에 믿던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비밀의 규율 혹은 비밀의 훈련이 바로 이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와 자신들도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그들에게조차도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거듭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후에 마침내 그리스도인 지원자가 되었을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에게 예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이 예수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듣게 되는 것은 그들이 마침내 세례후보자들이 되어 마지막 교리교육을 받을 때였다.

나는 이 사실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은 이미 오랜 견습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해야 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새겨지고, 그들의 삶에서 반사적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바로 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도 그들을 가르치고 모범이 되었던 그리스도인들처럼 예수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배타적이었던 이교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매료시키고 마침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없이 그야말로 고구마 찌르듯이 푹푹 찔러 반응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교회로 끌어들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고구마 전도로 유명해지고 마침내 목사가 된 고구마 전도왕조차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탄이 사용하는 사탄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변질된 것이다. 그리고 그 효시가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가장 존경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417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주교로 있던 히포 레기우스에서 지냈다. 2년 동안 그는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전염성 있는 바이러스를 격퇴하는 싸움에 가담했다. 피터 브라운에 따르면, 이것은 그를 라틴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선례가 없는 작전 행동에 돌입하도록 이끌었다. 아프리카 주교 회의는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로마에 있는 교황청과 라벤나에 있는 황궁에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 서둘러 감독 대표들을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조신들을 위한 뇌물로 바쳐질 80마리의 아프리카산 종마들이 대표들과 함께 라벤나까지 여행했다. 그 모든 일에서 전략을 짜고, 조직을 만들고, 서신을 주고받고, 설교했던 이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신앙심 깊은 야심가’라는 모순을 심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선한 목적을 위해 정치·군사·경제적 권력을 사용하기 위해 뇌물이라는 수단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이후로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그의 방식을 관행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에 가져온 국가주의 영성을 그리스도교 안에 신학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안에 ‘정당한 전쟁’이 자리하게 되었고,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안에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의 틀을 공고하게 구축했다. 그리고 신학은 더 이상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을 대변함은 물론 절대성을 추구하는 카인의 후예들의 신학이 되었다.

신학이 다르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신학은 달라야 정상이다.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인간의 하느님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목적에서 벗어나 분리와 개인주의라는 함정에 빠지도록 만드는 사탄의 도구가 된다. 신앙의 절대적인 겸손을 사라지게 하고 평화를 도모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전광훈처럼 사나운 싸움꾼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와 형제들이 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신학 이해 따위로 갈라지지 않는다!!

나는 바른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반사행동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싶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 그들 가운데 임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교회를 보고 싶다. 물가가 올라 삶이 힘들어진 것이 아니다. 시대가 어둡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그런 그리스도인들, 그런 교회가 그립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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