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의 아름다움을 우스꽝스런 흑백 스냅사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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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의 아름다움을 우스꽝스런 흑백 스냅사진처럼
  • 진용주
  • 승인 2023.03.1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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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용주의 사진..그리고 적막함

이번 주 두 번째의 야근. 채칵채칵 밤은 깊어가고, 이렇게 시간이 늦어질수록, 죽은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손은 더디고 눈은 침침하다. 지금 교정 보고 있는 건 제주 4·3을 다룬 책. 보리줄기를 바탕재료로 삼아 만든 그림과 청소년들도 읽을 수 있게 다듬은 글이 어우러진, 말하자면 그래픽 다큐멘터리 같은 책이다.

4·3을 다룬 말들은, 이미 순화된 말들인데도, 생채기가 난다. 처음 4·3을 안 것은 아마도 87년 말인가 88년 초인가 그랬을 텐데, 한동안 그 사건에 몰두했었다. 언젠가 좀 자세한 글을 써보고 싶은데, 4·3의 디테일한 부분들을 계속 읽다보면 어떻게 이 정도의 극단적인 폭력이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궁금해진다. 조선 말-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근대의 시간 속에, 어떻게 이 정도의 농도와 밀도로 미친 것처럼 폭주하는 (국가)폭력이 가능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잘 준비된 사악한 악마새끼들이 섬과 거기 사람들의 삶을 조각조각냈는데, 그 디테일은 정말 쇼킹하다. 한남- 한남- 하지만, 와우, 태초에 근원이 저기였나 싶을 정도의 잔혹함과 엽기적인 수준이 어마무시하다.

그러니 교정 사이사이에 무언가 정신에 단 것을 채워주어야 한다. 순화된 말들이라도 나는 그 말들 이면의 것들, 사건의 세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방어기제가 필요하고, 지금은 그것이 며칠 전부터 다시 읽고 있는 포루그 파로흐자드의 시다. 그녀의 언어가 혹은 코냑이자 백주인 것이다. 높은 도수의 한 잔!

 

모모 연구소의 모모 선생님에게 ‘여성’ 인물(시인, 왕비, 미술작가, 판사, 활동가 등등 다양한 사람들을 뭐 하나로 묶을 수가 없네, 어휘력 바닥이다)로 들여다보는 이란사회/이란사 아이템에 대해 제안을 드렸다. 거기 호응해 선생님이 주신 리스트에 내가 처음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두 명의 이름이 있어 조금 좋았던 것이다.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와 미술작가 쉬린 네샤트다. 그래서 기획안 보완과 샘플원고를 요청드린 사이에, 매일 파로흐자드를 읽고 있다. 2014년 쉬린 네샤트의 전시에서 인용된 것을 처음 읽고 그녀의 시집을 샀었다. 이젠 십년에 가까운 과거가 되었고, 지금은 또 다르게 그녀의 말들이 몸에, 몸으로 읽힌다. 그러니 며칠은 그녀의 시를 계속! 오늘은 첫번째로 <태엽인형>. 세상에나, 제목 봐라...

... ...

이보다 더
오, 그래
이보다 더 오래 말없이 있을 수 있어

오랜 시간
죽은 자들의 것 같은 눈길을
꼼짝 않고 담배 연기에 고정할 수 있어
컵 모양에
카펫 위 빛바랜 꽃에,
벽에 그은 흐릿한 선에 고정할 수 있어

마른 손아귀로
커튼 한 쪽을 젖히고 볼 수 있어
길 한가운데, 세찬 비 내리는 걸
한 아이가 색동 연을 들고
현관에 서 있는 걸
낡은 마차 한 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광장을 떠나가는 걸
커튼 곁에 눈 먼 채 귀 먹은 채
꼼짝 않고 있을 수 있어

아주 억지스럽고 이상한 소리로
외칠 수 있어
“나는 사랑합니다”

한 남자의 힘 있는 두 팔 안에서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 될 수 있어
가죽 식탁보 같은 몸으로
크고 단단한 두 젖가슴으로
술주정뱅이, 미친 사내, 떠돌이의 침대에서
순결한 사랑을 더럽힐 수 있어

이상한 어떤 수수께끼라도
속임수를 써 우습게 만들 수 있어
글자 맞추기 퍼즐 게임만 할 수 있어
말도 안 되는 답, 맞다, 대여섯자짜리
말도 안 되는 답을 찾느라 별별 궁리를 다 할 수 있어

한 평생을 추운 사당 앞에서
머리 숙이고 무릎 꿇을 수 있어
모르는 사람의 무덤에서 신을 볼수 있어
한 푼 때문에 개종할 수 있어
회교 사원의 회랑에서 시편을 낭송하는 어느 노인처럼 썩어갈 수 있어

숫자 0을 갖고 하는 나누기 더하기 곱하기처럼
항상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
분노의 눈꺼풀 속의 그대의 두 눈을
낡은 구두의 빛 바랜 단추로 여길 수 있어
물 없는 웅덩이처럼 스스로 말라버릴 수 있어

한 때의 아름다움을 우스꽝스런 흑백 스냅사진처럼
수줍어하며 트렁크 밑바닥에 감출 수 있어
어느 하루 빈 채로 있는 액자에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 정복당한 사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그림을 넣을 수 있어
벽의 틈을 가면들로 가릴 수 있어
훨씬 더 말도 안 되는 그림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

태엽인형처럼 돼
유리로 된 두 눈으로 자기 세상을 볼 수 있어
펠트 상자 속에서 짚으로 꽉 찬 몸뚱아리로
여러 장식과 천들 사이에서
수년간 잠 잘 수 있어
음탕한 누군가의 손이 누르면
까닭 없이 소리 지르고 말할 수 있어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중, 신양섭 옮김, 번역은 정승옥 선생님이 일부 수정)

 

진용주 
<우리교육> 기자, 디자인하우스 단행본 편집장 등 오랫동안 기획, 편집, 교정교열, 디자인, 고스트라이팅 등 여러 방법으로 잡지와 단행본을 만들며 살았다. 책을 만드는 것만큼 글을 쓰는 일도 오래 붙잡고 지냈다. 장만옥에 대한 글을 쓰며 남에게 보이는 글의 고난을 처음 실감했다. 덴마크 루이지애나미술관에 대한 글을 쓰며 미술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들지 않을 때 여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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